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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간 뒤 형형색색의 절경이 등장한 것처럼 한국 축구가 모처럼 화사하게 빛났다.
출항하자마자 모진 풍파에 시달려온 축구국가대표 ‘신태용호’가 남미의 강호 콜롬비아를 상대로 내용과 결과를 모두 잡았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이 8개월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경기력 부진, 히딩크 부임 논란 등으로 질타를 받았던 신태용호는 스스로 꼬인 실타래를 푸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월드컵 본선 프로젝트’에 가속페달을 밟게 됐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FIFA랭킹 62위)은 지난 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콜롬비아(13위)와 A매치 평가전에서 주력 공격수 손흥민의 멀티골 활약에 힘입어 2-1로 승리했다.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운명의 월드컵 최종 예선 2연전을 앞두고 소방수로 투입된 뒤 A매치 4경기에서 무승(2무2패)에 그쳤던 신 감독은 마침내 첫 승을 거뒀다. 지난 4경기에서 자신의 축구 색깔보다 다급한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식 축구를 해온 신 감독은 축구협회를 둘러싼 논란과 맞물려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신태용 축구’의 진가를 90분간 확실히 증명하면서 반전의 디딤돌을 놓았다. 14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리는 세르비아와 11월 두 번째 맞대결에서 상승세를 이어가겠다는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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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란데 특급조언+신태용 선택…맞춤식 용병술 빛났다
신태용호의 반전을 이끈 원동력은 용병술이다. A대표팀에만 오면 작아졌던 손흥민을 깨어나게 한 투톱 전술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지난 시즌 잉글랜드에서 21골을 넣은 손흥민은 대표팀에선 1년 1개월째 필드골이 없었다. 신 감독이 지난 4경기에서 손흥민을 주포지션인 왼쪽 윙뿐 아니라 프리롤(공격 진영에서 자유롭게 활동)로 두는 등 활용법을 찾고자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토트넘에서 중앙 공격수로 나서면서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를 활용한 공간 지배, 골 결정력을 살려낸 모습을 고스란히 대표팀에 입혔다.
신 감독은 이번 소집 명단에 중앙 미드필더 자원을 유독 많이 뽑아 토트넘처럼 3-5-2 포메이션을 사용하리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안방에서 개인 기술이 좋은 콜롬비아를 상대로 수세적인 3-5-2를 사용하는 것보다 4-4-2를 통해 전진 압박을 가하면서 손흥민의 장점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 투톱 선발 파트너도 이정협 대신 활동폭이 큰 이근호를 골랐다. 이근호가 중앙, 측면을 가리지 않고 뛰었는데 전반 11분 만에 이근호의 오른쪽 크로스에서 손흥민이 오른발 선제골을 넣었다. 후반 15분엔 오른쪽 풀백 최철순의 침투 패스를 손흥민이 문전에서 결승골로 연결했다.
투톱 전술이 성공하는 데 조연 구실을 한 건 중앙 미드필더로 나선 기성용-고요한이다. 공수를 오가며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패스의 질 또한 뛰어났다. 특히 풀백이 주포지션인 고요한은 중원에서 콜롬비아 기둥 하메스 로드리게스를 밀착 방어해 한국이 이기는 데 이바지했다. ‘고요한 중원 카드’는 대표팀에 새로 합류한 스페인 출신 토니 그란데 수석코치의 조언에서 비롯됐다. 스페인 대표팀에 있을 때부터 세계 주요 팀 분석 영상 자료를 보유한 그는 신 감독에게 하메스 전담 마크맨 설정을 조언했다. 신 감독은 기존의 중앙 미드필더 자원 대신 고요한을 선택했다. 그는 “내가 고요한에게 ‘K리그에서 제일 더럽게 공을 찬다’고 했다”며 “하메스를 거칠게 밀어붙이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으니 붙어 다니라고 했다”고 말했다. 고요한이 100% 역할을 해내면서 신 감독의 소신 있는 선택이 적중해 그란데 코치와 첫 합작품이 성공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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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정신력…공감과 혁신, 그리고 명확한 목표 설정
한국의 두 골 승리보다 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건 태극전사의 경기 자세다. 과거 한국 축구는 투쟁심, 전투력 등 정신적인 힘으로 다른 나라보다 부족한 기술을 메우면서 선전했다. 2010년대 들어 해외에 진출하는 여러 재능 있는 선수가 나타났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다소 이기적이고 나태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 소집 때는 신 감독이 틈 날 때마다 정신적인 동기부여를 강조했고 그런 정신력이 그라운드에서 제대로 발휘됐다는 평가다.
콜롬비아전을 통해 얻은 교훈 중 하나는 ‘국가대표 선수 정신력’도 더욱 현대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태극전사가 다른 자세를 보인 건 공감과 혁신, 명확한 목표 설정 등 ‘현대판 정신 무장’에 요구되는 요소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2010년 이후 올림픽,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낸 박건하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이젠 머리에 피가 나고, 붕대를 감는 것으로 정신력을 대변하면 안 된다”며 “요즘 후배들의 정신 무장은 팀 분위기를 다잡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 감독과 코치진이 위기의식을 선수들에게 심어준 게 공감을 얻으면서 기본자세부터 가다듬게 됐다. 경험 많은 스페인 출신 코치를 영입해 준비 과정서부터 혁신을 가져다준 것도 효력이 있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손흥민과 이근호 투톱, 고요한의 중원 투입 등 선수 개개인별 목표 설정을 명확하게 하면서 책임감을 불어넣어준 게 집중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박 위원은 신태용호가 콜롬비아전에서 뽐낸 강한 정신 무장을 지속하려면 선수 맞춤별 관리가 더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우리 세대의 정신력은 다소 주먹구구식이었다. 요즘 세대는 예전보다 정보도 빠르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대인 만큼 감정을 다스리고 디테일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태극마크라는 명분 아래 ‘파이팅’을 외치는 게 아니라 소집 전부터 소속팀에서 지내온 과정, 심리, 훈련 방식에 맞게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팀은 매일 소통하지만 대표팀은 다르다”며 “감정 하나하나를 잘 살펴야만 정확하게 목표를 줄 수 있고 그래야 단시간에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kyi048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