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KT 배정대의 타구가 낮게 떠올라 LG 2루수 신민재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관중석은 평소 한국시리즈(KS) 최종전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KS 우승팀이 결정되는 순간은 바로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함성에 휩싸인다. 함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응원가와 구호를 외치는데, 이 잔상이 수 시간 지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만큼 강렬하다.
그런데 29년 만에 KS 우승 염원을 푼 LG 팬은 함성이 터져나와야 할 시간에 통곡(?)을 했다. “와”도 아니고 “우”도 아닌 “우”와 “오” 사이의 묘한 발성의 환호(?)가 이어지더니 응원가와 구호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폭죽소리를 압도할 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우와 오 사이의 묘한 발성’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LG 우승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LG팬은 좋겠다’였다. 강산이 세 번 바뀌기 직전까지 한결같이 염원하던 우승을 통합우승으로 장식하는 장면을 ‘드디어’ 목격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장시간 응원하는 게 어려울뿐더러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세월을 견딘 LG 팬이 올시즌 KBO리그의 진정한 승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LG의 통합우승은, 이들을 지지하는 팬 덕분에 KBO리그에서 손꼽히는 영광의 순간이 됐다.
생각이 꼬리를 물자 ‘부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절망의 세월을 논하자면, 적어도 KBO리그에서는 롯데팬을 이길 팀은 없다. 롯데가 2024시즌에 기적처럼 우승해도 32년이나 걸렸다. 태어나자마자 LG의 우승장면을 본 아기가 29세 성인이 됐을텐데, 그도 롯데 우승은 흐릿한 ‘옛날TV 화면’으로만 접했을 것이다.
서울 찬가를 외치는 LG팬의 폭풍오열에 부산갈매기를 떼창하는 롯데 팬의 미래가 오버랩됐다. “에이”라는 자조섞인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당장 현실이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서다.
다른 각도로 보면, 오지 않을 것 같던 LG의 우승순간도 결국 눈앞에서 펼쳐졌다. LG는 이른바 ‘10년 대계’를 구상하고 설계한지 정확히 11년 만에 대업을 달성했다.
2010년 당시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코치였던 김기태 감독(현 KT 2군감독)을 2군 사령탑에 앉혀 육성 기치릴 내걸었고, 2012년 1군 감독으로 선임한지 2년 만에 역사적인 포스트시즌 재입성을 일궈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분패 이후 11년 만의 쾌거였다.
김기태 감독이 LG 지휘봉을 잡은 뒤 툭하면 불거지던 선수단내 잡음이 사라진 게 신호탄이었다. ‘팀 트윈스’라는 단어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후 곡절은 있었지만 꾸준히 4강권에 도전할 만한 팀으로 성장했다.
2군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팀 방향성에 맞는 선수를 스카우트해 집중육성하는 등 현장과 프런트의 조화가 이뤄진 시기이기도 했다.
삼성 왕조를 이끈 류중일 감독을 사령탑에 앉히는 파격 인사도 있었고,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류지현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겨 연속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젊은 선수들은 꾸준히 단기전 경험을 쌓았다.
KS MVP를 차지한 ‘캡틴’ 오지환은 “1차전 때는 (휴식기가 길었던 탓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는데, 2차전부터는 다시 차분해졌다. 정규시즌을 치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1년 만에 포스트시즌(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때는 베테랑들도 처음 밟는 무대여서 실수가 많았다. 그러나 2023년 LG는 짧지만 반복적으로 단기전 경험을 쌓아 중압감에 내성이 생긴 것으로 보였다.
LG가 29년 만에 우승한 데는 ‘구단의 방향성과 현장에 대한 신뢰’라는 확실한 내비게이션이 버팀목 역할을 했다. 이 내비게이션은 ‘우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은 시행착오는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우승청부사’ 김태형 감독을 영입한 뒤 프런트 출신인 박준혁 단장으로 체질개선에 나선 롯데도 견고한 내비게이션을 만들어야 한다. 10년 전 LG보다 가능성있는 젊은피가 더 많으므로, 목적성만 뚜렷하다면 숙원을 풀기까지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LG 염경엽 감독은 “올해 우승은 LG가 명문팀으로 도약하는 원년”이라고 강조했다. 롯데의 2024시즌은 ‘10년 대계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zzang@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