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기자] 1999년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다. 2016년 tvN ‘디어 마이 프렌즈’에 나오기까지, 주로 연극무대에 서거나 영화 단역을 맡았다. 단역도 1년에 한 두 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2015년 연극 ‘잘자요 엄마’에서 나문희와 짝을 맞춘 걸 관람한 노희경 작가가 그를 캐스팅한 게 염혜란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후 tvN 드라마 ‘도깨비’(2016)에서 은탁(김고은 분)의 고모 지연숙으로 얼굴을 알린 뒤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2017), KBS2 ‘동백꽃 필 무렵’(2019)등 의미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이후 OCN ‘경이로운 소문’(2020), 영화 ‘빛과 철’(2021)로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이어 지난해 선보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2023)와 ‘마스크걸’(2023)로 ‘염혜란 시대’가 활짝 열렸다. 코미디가 바탕이 된 유쾌한 연기와 더불어 ‘빛과 철’에서처럼 깊이 있는 내면 연기도 일품이다. 어떤 역할이든 마치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그려냈다. 신작 ‘시민덕희’에서도 그 강점이 어김없이 발현됐다.
언제나 수준급의 연기력을 펼치는 염혜란이지만 그는 아직 목마르다. 염혜란은 “시사회 전에 완성본 봤을 때는 우울했다. 아쉬운 것만 생각나서. 객관적인 눈이 안 생겨서 그런지, 다들 좋아해 주는데 나만 힘들었다. 비록 제 성에는 안 차지만, ‘시민덕희’가 용기를 주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시민덕희’에서 염혜란이 맡은 봉림은 조선족 출신으로 3200만원 상당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김덕희(라미란 분)의 직장 동료다. 연변에서 한국에 와서 아무도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지 않을 때 힘이 된 덕희에게 정성을 다한다. 그 의리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덕희를 위해 중국까지 넘어가 통역을 했다. 덕희와 봉림이 동고동락하는 사이, 염예란도 라미란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다.
“‘시민덕희’ 찍으면서 미란 언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보고 ‘제2의 라미란’이라고 하는데 전 아직 멀었어요. 언니는 이 과정을 다 거쳤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처음부터 주인공은 아니었잖아요. 점차 비중과 인지도를 높이면서 이 자리에 온 거잖아요. 언니도 누군가의 친구였던 적이 많았어요. 참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고, 반성도 많이 했어요.”
염혜란은 라미란에게 대본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대부분 ‘대본에 있는 내용을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는데, 라미란은 필요 없는 부분은 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염혜란은 “뒤통수를 확 쳤다. 미란 언니의 연기에는 절제가 녹아있다. 배우가 자기 분량을 빼는 건 정말 큰 용기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염혜란의 가장 큰 무기는 자연스러움이다. 연기하기 어려울 법한 비현실적인 상황에도 염혜란은 마치 그 일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포장한다. 연극 무대에 오래 섰음에도 극적인 이미지보다는 실제 있을법한 현실연기로 접근한다.
“연극을 할 때 배운 게 그거예요. 할머니 맡았다고 허리 구부리고 목소리 변질 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너의 목소리로 시작해라’라는 가르침을 많이 받았어요. 제 목소리로 시작해서 꾸준한 연습과 훈련 끝에 인물의 목소리로 나아가는 거죠. 흉내 내지 않는 법을 배웠어요.”
극단에 들어간 뒤 약 20년 만에 무명 생활을 극복했다. 무명생활이 긴 만큼 경제적인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론 관객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허탈감과 실망감을 넘어 괴로움을 느꼈다. 그 역경을 이겨내서인지 염혜란의 연기에는 페이소스가 짙다.
“가난했지만 그걸 부각하고 싶지 않아요. 연극 보러 오는 관객이 없을 때가 가장 비참했던 것 같아요. 악플보다 무플이 더 외로워요. 조금의 관객만 있어도 버틸 힘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없을 때 정말 힘들었죠. 제가 원했던 건 전 세계 관객은 아니었어요. 함께 호흡해줄 약간의 관객이었죠. 요즘은 알아봐 주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행복해요.”
앞서 진행된 ‘시민덕희’ VIP 시사회에는 ‘더 글로리’에서 호흡을 맞춘 송혜교가 깜짝 방문해 염혜란을 응원했다. 인기배우의 예상 못 한 방문에 현장은 들썩였다. 당사자인 염혜란도 많이 놀랐다고 했다.
염혜란은 “송혜교의 응원이 어떤 인터뷰보다 파급력이 큰 걸 보고 톱배우의 위력을 느꼈다. 제게 연락을 안 하고 왔다”며 “전 연락도 미처 못했다. 혜교씨가 바쁠 거라 생각했다.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다. 자주 연락도 못 한다. 서프라이즈였다. ‘시민덕희’ 첫 공개 날이라 걱정을 많이 했다. 혜교씨가 정말 재밌으니 걱정하지 말고 즐기라고 했다. 정말 큰 힘이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