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배우 정은채의 연기력이 대중의 눈도장을 찍은 건 쿠팡플레이 ‘안나’(2022)였다. 철없는 20대 부잣집 딸이자, 세상 물정 모르고 아랫사람들을 하대하는 현주로 놀라운 기량을 뽐냈다. 안나(수지 분)에게 시샘을 느끼게 한 인물이다. 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2023)에선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고시생 여친을 맡아 생활연기도 훌륭히 펼쳤다. 애플TV ‘파친코’에선 선자(김민하 분)의 비빌언덕이 돼주는 젊은 시절 경희로 또 한 번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간의 내공이 tvN ‘정년이’에서 모두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정년이’에서 정은채가 맡은 인물은 매란국극 남성 역을 주로 맡는 문옥경이다. 국극 내 최고 스타이자, 기자들이 뒤를 쫓는 전국구 스타기도 하다. 사실상 ‘정년이’에서 세상의 이치를 알고, 매란 국극의 길을 여는 인물이다. 공익적 욕망이 사적 욕망보다 더 큰 공무원형 인재이기도 하다.

소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정년(김태리 분)을 발굴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자신의 뒤를 이을 남성 역할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정년이 가진 단점을 미리 파악하지만, 굳이 먼저 알려주지 않고 알아서 알에서 깨길 천천히 기다릴 줄 알기도 한다. 필요할 때 적극나서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영리함도 있다. 정년이 구슬아기 해석에 어려움을 겪자, 정년의 장점을 키우면서 단점은 최소화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자신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건 정확히 막는다. 혜랑(김윤혜 분)의 집착적인 애정 공세에 단호하게 선을 그을 줄도 알며, 옥경이 아편에 취했다는 풍문에 기자들을 직접 만나 대응하기도 한다. 내 안에서 나를 믿어줘야 한다며 매란 국극 재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십도 있다. ‘정년이’에서 매란국극 단장 강소복(라미란 분)과 함께 나무처럼 국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알뜰살뜰 챙길 줄 아는 포용력도 가진 것. 한 명쯤 꼭 내 옆에 있길 바라는 인재다.

언니이자 선배인 문옥경이 몸과 마음으로 챙기는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 조급하고 불안한 정년이 그나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매란국극이나 정년이나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경험이 많고 시야가 넓은 옥경이가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점에서 그리 걱정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연기라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연기자가 멋이 없으면 해당 인물도 그리 멋지기 힘들다. 정은채 역시 옥경처럼 주위를 잘 살피는 배우라는 평가다. 실제로 정은채와 함께 작업한 스태프들은 그의 인격에 엄지를 치켜세운다. 현장에서 배우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현장 분위기를 늘 좋게 풀기 위해 따뜻하게 노력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에서 함께 작업한 형슬우 감독은 “저예산 영화라서 배우들도 쉽지 않았을 텐데, 은채씨는 늘 웃는 얼굴로 주위를 대했다. 오히려 더 스태프들을 아끼고 챙겼다”며 “보기 드물게 나이스한 성격을 갖고 있다. 연출가 사이에서도 은채씨 연기력이 정말 좋다고 입을 모은다. 연기력이나 평소 행실이나 모두 문옥경을 닮았다”고 밝혔다.

여러 논란이 많았던 배우기도 하다. 타인에게 피해가 될까 오히려 입조심하고 본업에만 충실하다는 게 주위의 의견이다.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에도 불구 ‘정녕 태평성대’를 누리진 못했다. 그런데도 한 발짝씩 나아가며, 대중을 설득하고 있다. 요즘엔 ‘멋진 왕자님’이라며 ‘정년이’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보이는 곳에선 성장이 분명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선 미담만 넘친다. 힘든 시기를 거친 정은채가 태평성대를 누릴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아 보인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