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 인턴기자] "K리그 복귀?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겠죠."


지난 2006년 3월 선수 생활을 마감한 유상철은 2009년 10월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1년에는 K리그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며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했다. 성공적이었던 선수 생활처럼 지도자 커리어도 탄탄대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2012시즌이 끝난 후 조용히 대전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는 2014년부터 울산대학교의 지휘봉을 잡았다. 일각에서는 1, 2년 내 프로 무대로 복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상철은 얼마 전 울산대학교에서 벌써 네 번째 시즌을 마쳤다.


그가 선수 생활을 시작한 곳이자 끝맺은 곳, 그리고 여전히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울산에서 스포츠서울이 유상철 감독을 만났다.


▲ '한일전의 사나이'가 한일전을 말하다


유상철 감독은 1994년 아시안게임 8강 일본과 경기에서 득점포를 쏜 것을 시작으로 대표팀 경기에서 일본만 만나면 맹활약을 펼쳐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몸을 사리지 않는 투쟁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이런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는 "물론 우리 세대가 한일 관계를 모두 피부로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역사적 응어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으냐"며 "유럽이나 남미 팀과 경기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선수 대기실에서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선배들의 눈빛도 레이저가 나올 것처럼 달라졌다.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라며 일본전을 앞둔 선수단 분위기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는 최근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를 예로 들며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만 봐도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직접 역사를 체험하지 않았지만, 일본에게는 반드시 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 두 번의 국내 복귀, 울산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울산의 레전드'로 불리는 유상철 감독이 지난 1994년 처음으로 프로 무대를 밟은 후 울산의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리그와 리그컵을 포함해 142경기다. 한 구단의 레전드로 회자되는 선수들에 비하면 아주 많은 경기를 소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2002년과 2005년 두 차례 국내로 복귀하면서 모두 울산을 택했고, 선수 생활 마무리 역시 울산에서 하며 여느 선수보다도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나는 서울 태생에, 대학교도 서울에서 나왔다. 프로 선수가 되면서 처음으로 울산이라는 곳을 방문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기에 낯설고 생소했다. 지금은 울산이 많이 발전했지만, 당시에는 시골처럼 느껴져 더 낯설었다"라며 울산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이어 "팬들과 교감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울산이라는 도시에 정이 많이 들었다"며 "울산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은 했지만, K리그에서 다른 팀을 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은퇴까지 울산에서 하게 됐다"라며 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 일본 무대를 밟은 '한일전의 사나이'


유상철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와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로서 능력은 일본에서도 빛을 발했다. 1999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하며 처음으로 일본 무대를 밟은 그는 요코하마에서 2시즌, 가시와에서 2시즌 동안 활약하며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이후 잠시 울산을 거쳐 2003년 다시 요코하마로 이적했다. 2003시즌 J리그는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를 진행한 후 플레이오프를 거쳐 우승팀을 가렸는데, 요코하마는 전기 리그에 이어 후기 리그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없이 통합 우승을 확정했다.


유상철은 "일본에 많은 한국 선수들이 진출했지만,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동시에 우승한 선수는 없었다. 내가 꼭 그 고지를 밟아 한국 선수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었다. 그리고 꿈은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 바르셀로나부터 토트넘까지… 문턱에서 이루지 못한 유럽행


유상철은 선수 생활 내내 슈투트가르트부터 PSV 에인트호번까지 유럽 클럽 이적설에 숱하게 휩싸였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이름은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클럽 바르셀로나였다. 1998년에는 바르셀로나로부터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았다는 보도가 국내 및 해외 언론을 통해 쏟아진 바 있다.


이에 관해 그는 "바르셀로나 측에서 테스트를 제의했다. 유럽 기자에게 전화가 오기도 했다"며 실제로 제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한 에이전트가 중개를 했는데, 그때 선수들 사이에서는 에이전트에 대한 개념이 정확히 잡혀있지 않았다.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테스트를 보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무산됐다. " 유상철은 "지금 생각하면 아쉽죠"라고 웃음지었다.


최고의 주가를 달렸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는 유럽에서 수많은 러브콜이 쏟아졌다. 언론 인터뷰에서 직접 "벨기에, 터키 등 중위권 리그는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유상철은 "잉글랜드의 토트넘 홋스퍼와 협상 타결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토트넘과 풀럼에서 제의가 왔었다. 그중 토트넘과는 최종 협상만 남겨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소속 팀이었던 가시와 선수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헹가래까지 받았을 정도로 이적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막판에 일이 꼬이면서 최종 결렬됐다"고 아쉬워했다. 한국 축구사 첫 프리미어리거로 박지성이 아닌 유상철의 이름이 새겨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 전설로 남은 '8경기 9골'. 그래서 더 아쉬웠던 유럽 진출 불발


유럽 이적이 무산된 유상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이적을 위해 가시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J리그 타 팀으로는 이적할 수 없다는 계약을 해 J리그 이적이 불가능했는데, K리그 이적 시장 역시 종료되는 바람에 자유 계약 신분으로 반년을 허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는 "일단 울산의 팀 훈련에 합류했다. 선수 등록을 한 상태가 아니기에 경기에는 나설 수 없었다. K리그 전 구단 감독님들이 원만히 합의해주셔서 극적으로 K리그 무대를 밟을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당시 K리그는 유상철과 황선홍을 구제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선수 등록을 인정했다. 2002년 8월 31일 국내로 귀국한 지 약 한달 만인 9월28일, 그의 이름이 울산의 선수 명단에 공식적으로 등재됐다.


이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유상철은 "남은 8경기에서 경기당 한 골씩 넣어 팀을 우승시키겠다"는 당찬 각오를 내놨다. 입단 선수의 형식적인 포부로 여겨졌던 이 말은 현실이 됐다. 그는 거짓말처럼 남은 8경기에서 9골을 터뜨렸다. 비록 우승컵을 거머쥐지는 못했지만, 입단 당시 울산의 순위가 중위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유상철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월드컵을 치른 후 몸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심리적으로도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라며 "K리그에서 경기를 뛰는데 마치 대학 선수들과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밝혔다. 그는 "그래서 그때 유럽에 가지 못한 것이 더욱더 아쉽다. 만약 그 몸 상태로 유럽에 갔다면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마음 한켠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 '포지션 is 뭔들'


유상철은 최전방 공격수에서 최후방 수비수는 물론 사이드까지 말 그대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뛰어본 유례가 없는 선수로 유명하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선수로서 정체성을 찾기 힘들어 고민이 많았다. '내가 특별히 잘하는 포지션이 없어서 이곳저곳에서 뛰게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라며 남다른 고민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변화는 생각의 전환에서 왔다. 유상철은 "거꾸로 생각했다. 해당 포지션에서 전문적으로 뛰는 선수보다 내가 더 잘하니까 나를 기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고 고민을 극복한 계기를 털어놨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3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할 때 한 가지 일화를 공개했다. 그는 "요코하마가 미드필더를 구하고 있다며 내게 접근했다. 나도 미드필더로 뛰는 것으로 알고 계약했다. 입단하니 라이트 백에서 뛰어야 한다고 했다"라며 "알고 보니 처음부터 라이트 백 선수를 찾았는데, 나를 영입하기 위해 미드필더를 구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라고 웃었다.


유상철은 여러 포지션에 서본 것이 감독으로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분명 도움이 된다. 각 포지션마다 스타일, 심리, 전술적 역할 등이 다른데, 이를 모두 경험해봤기 때문에 선수들을 지도할 때 한결 수월하다. 지도자로서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 대전 창단 이래 최악의 위기를 극복해내다


유상철 감독은 2011년 승부조작 사건으로 주전급 스쿼드가 사실상 반토막 난 대전의 지휘봉을 잡았다. 2012시즌에는 2부 리그 출범을 앞두고 강등 제도까지 도입되며 대전을 위협했다. 창단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팀을 빠르게 재정비해 1부 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그러나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당시 많은 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쉽다"고 운을 뗀 그는 "2년 정도 대전을 지도하며 선수 파악을 완료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명확한 팀 컬러를 구축해나갈 수 있는 타이밍에 계약이 만료됐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재계약이 무산되면서 팀을 나오게 됐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나 "좋지 않은 환경 아래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희망을 가꿨던 시간이 지도자로서 많은 도움이 됐다"며 대전에서의 시간이 '감독 유상철'에게 좋은 밑거름이 됐다고 언급했다.


▲ K리그에서 대학 리그로, 울산대학교 감독 유상철


2014년부터 울산대학교의 지휘봉을 잡은 유상철 감독의 지도자 경력에는 유독 준우승이 많다. 그는 "중요한 길목에서 경기 내용은 절대 밀리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은 경기가 많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스트레스였다. 트라우마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를 극복하겠다고 마음먹으니 경기 결과에 집착하게 됐다. 부담을 가지니 선수들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라며 심적으로 큰 부담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던 순간 욕심을 버리니 길이 보였다. 그는 "이제는 우승에 대한 부담을 내려놨다. 선수들에게도 결과는 내가 책임질 테니 결승까지만 가자고 말한다"고 전했다.


유상철 감독이 강조하는 것은 '과정'이었다. 그는 "결과가 중요한 시대지만, 과정 없는 결과는 오래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에게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다. 져도 어떻게 졌는지, 팀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졌느냐' '이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방법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소신을 밝혔다.


입지 좁아지는 대학 리그, 개선책 필요해


최근 선수들의 조기 유럽 진출이 활발해지고 K리그에서도 23세 이하 선수 의무 출전 조항이 생기는 등 여러 요인으로 대학 축구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유상철 감독은 "확실히 대학 선수들의 취업 문턱이 높아지고 있다. 2부 리그가 출범하며 팀은 많아졌지만, 오히려 대학 선수들의 프로 진출은 힘들어지고 있다. 클래식 팀은 챌린지에서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려 하고, 챌린지에서는 내셔널리그 선수들을 데려간다"고 분석했다.


그는 "4학년 선수들은 더욱더 힘들다. 즉시 전력감이 아니면 데려가지 않는다. 남은 선수들은 그대로 도태되는 것이다. 이런 선수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며 고학년 선수들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도 전했다.


'날아라 슛돌이' 은사가 보는 이강인


유상철 감독은 지난 2007년 KBS2 '날아라 슛돌이' 3기를 통해 이강인을 지도한 바 있다. 당시 7살이었던 이강인은 현재 스페인 발렌시아의 유소년 팀에서 뛰며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그 나이에 강인이처럼 공을 차는 선수는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잘했다. 최근엔 직접 가서 경기를 한 번 보기도 했다"라며 이강인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과시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유망주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환경을 갖춘 곳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는 말을 곁들였다.


▲ K리그 복귀? 언젠가 좋은 기회는 올 것


K리그 팀의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면 어김없이 유상철 울산대학교 감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이번 시즌에도 시즌 중반 감독을 교체한 일부 구단의 감독 후보로 여러 차례 언급되기도 했다. 그는 "소문이 나면 될 것도 안되는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이어 "일단 K리그 팀들 차기 감독 후보로 오르내린다는 것 자체가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니 긍정적인 거 같다"라며 "당장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곳은 없지만, 언젠가 K리그 팀을 지도하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갖고 있다. 물론 지금은 울산대학교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다"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인터뷰를 마친 유상철 감독은 지난 19일 AFC 'P' 라이센스 교육을 위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그가 언제 K리그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로무대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유비'의 화려한 귀환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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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도형기자 way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