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5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제주도를 상징하는 것은 많다. 한라산, 감귤, 말, 오름, 현무암, 그리고 해녀가 있다. 요즘에는 삼다수도 있다. 꼽자면 끝이 없다.
옛날에는 여자, 바람, 돌이 많다고 해서 3다(多),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고 3무(無)의 섬으로도 불렀다. 육지와 내왕이 힘들어 제주만의 생활 문화가 오랜 세월 이어져 왔고, 지금은 고유한 문화유산이 됐다.
‘선데이서울’ 239호(1973년 5월 13일)는 ‘금남의 영역’인 제주 해녀의 세계에 뛰어든 27살의 해남(海男) 문OO씨 이야기를 취재해 소개했다. 50년 전, 당시 제주 해녀의 숫자는 약 1만4000여 명. 이들 중 해남은 문씨 딱 한 명이었다. 꽃 중의 꽃이었고 숫자로만 보면 거의 여왕벌(?) 수준이었다.
그가 해남이 된 사연은 간단했다. 1959년9월 전국을 할퀴고 지나간 태풍 ‘사라’ 때문에 부친이 하던 조선업이 기울었다. ‘사라’는 전국에 3382명의 사상자, 37만3459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국내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태풍이었다.
당시 16세 소년은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가 해남이 된 계기였고 이유였다. 보도 당시 그는 3분 이상을 잠수하는 11년 차의 실력 있는 해남이었다.
해녀는 잠수 시간을 기준으로 상·중·하 군으로 나눈다. 상군 해녀가 2분 정도인데 그는 상군 해녀보다 1분이나 더 길었다. 잠수시간이 긴 만큼 더 깊이, 더 오래 수중 작업을 할 수 있었으니 수입도 자연히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성실하고 성격 좋은 그는 인기도 많았다. 청일점 젊은 남자였으니 아들 같기도, 애인 같기도, 손자 같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도 해녀로 해남·해녀 부부였는데 두 사람의 벌이가 한 해 50만 원 수준이었다. 당시 말단 공무원 월급이 1만7300원 정도였으니 거액 연봉이었던 셈이다.
50년 동안 그 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딱 한 명이었던 제주도 해남은 2022년 기준 13명으로 늘어났다. 매우 더디긴 하지만 50년간 13배의 성장이다. 반면에 그 많던 해녀는 계속 줄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와 담당자 설명으로는 1970년 1만4143명이었던 해녀는 2006년 5406명, 2021년 3437명, 2022년에는 3226명으로 줄었다. 이마저도 대부분의 해녀가 60대 이상이고 80대도 적지 않다니 더 줄어들 것이다.
수온 상승 등 기상이변으로 근해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데다 힘든 물질을 하려는 젊은이들은 턱없이 부족하니 줄어드는 해녀 수를 막을 방도가 요원하다.
해녀나 해남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어촌 공동체인 어촌계와 마을 해녀회 회원이 돼야 물질을 할 수 있다. 별다른 장비 없이 바닷속을 드나들며 먹거리를 따는 원시적 작업인 물질은 TV나 유튜브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걸음 조차 힘들어하는 80대 해녀도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마치 인어라도 된 듯 부드럽게 유영한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년 없이 가장 오래 일하는 직업이고, 그 해녀가 바다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는 해녀는 여성 인력수출의 효시기도 했다. ‘제주도세유람’에는 1937년 무렵, 제주 해녀가 경상·전라·충청·황해·강원·함경도까지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출항 해녀 혹은 출가 해녀라고 불린 이들은 타지에서 돈을 벌고 더러 그곳에서 결혼도 했다. 한 발 더 나가 해외로도 진출했다. 일본 쓰시마·도쿄·가고시마, 중국 칭다오·다롄, 심지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 우리나라의 해외인력수출 1호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전에도 출항 해녀가 있었다니 아마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제주 해녀 문화는 지난 2016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7년에는 국가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해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조직도 만들고 구좌읍에 해녀박물관도 지었다. 해녀는 귀중한 제주의 문화유산이자 우리나라, 또 세계의 문화유산이다.
‘선데이서울’이 소개했던 당시 27살의 그 해남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5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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