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글·사진 | 괌=원성윤 기자] 여행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익숙한 편안함을 택할 것인가, 낯선 모험을 감행할 것인가. 태평양의 보석 괌(Guam)은 이 이분법적인 질문에 대해 가장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곳이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타인의 속도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나의 의지대로 질주할 때 여행의 결은 비로소 풍성해진다.
최근 여행가들 사이에서 ‘괌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거나 ‘상권이 무너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오히려 지금이 여행 적기다. 최근 괌 왕복 항공권이 20~30만 원대까지 떨어지며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직접 두 발로 디딘 괌의 풍경은 그 소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활기로 가득 찼다. 주요 관광 스팟마다 셔터 소리와 함께 추억을 남기려는 한국인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유명 맛집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유럽, 중국, 미국 본토에서 온 미식가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이디야 커피’ 등 익숙한 한국 브랜드의 간판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여행자들에게 묘한 안도감과 반가움을 선사한다. 괌은 여전히 뜨거웠고, 건재했다.
20년 차 기자 생활 동안 숱한 길 위에서 깨달은 건 ‘균형’의 미학이다. 괌에서의 여정 역시 렌터카를 빌려 자유를 만끽하는 날과, 셔틀버스에 올라타 관조자가 되는 날의 ‘믹스 앤 매치(Mix & Match)’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교통수단의 선택을 넘어, 여행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 ‘객체’의 미학…핸들을 놓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운전대를 놓는다는 건, 통제권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다. 첫날은 과감히 운전석이 아닌, 괌의 명물 ‘레드 구아한 셔틀(Red Guahan Shuttle)’에 몸을 실었다. 습한 바람이 들이치는 개방형 뒷좌석 대신,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쾌적한 앞좌석을 택했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공기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내비게이션의 지시나 주차 공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비로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셔틀이 데려다준 곳은 괌 북부의 쇼핑 랜드마크 ‘마이크로네시아 몰’과 ‘K-마트’다. 미국령인 탓에 1달러가 아쉬운 고환율 시대지만, 그 안에서도 합리적인 가격표를 단 물건들을 발굴해내는 재미는 여전하다. 화려한 명품이 아니더라도 나의 취향과 예산에 딱 맞는 가성비 좋은 아이템을 손에 넣었을 때의 짜릿함. 이것이야말로 쇼핑이 주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K-마트에서 지인들을 위한 마카다미아 초콜릿을 고르는 마음은, 여행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관계의 연장임을 상기시킨다.
운전대를 놓았기에 누릴 수 있는 여유는 돌아오는 길에서 빛을 발한다. 마이크로네시아 몰을 둘러보고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셔틀버스에 몸을 싣는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투몬의 노을을 바라본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은 아름답게 흐른다. 때로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동성’이 가장 능동적인 휴식이 된다.
◇ ‘주체’의 질주…야생의 자연 속으로



관조의 시간이 끝났다면, 이제는 주체적으로 움직일 차례다. 나에게 맞는 렌터카를 고르는 일은 여행의 파트너를 구하는 일과 같다. 편안한 소통과 한국적 정(情)이 필요하다면 한인 스태프로 이뤄진 ‘드림 렌터카’를, 효율과 차량 컨디션을 중시한다면 ‘닛산 렌터카’를, 익숙한 브랜드의 신뢰를 원한다면 ‘글로벌 체인’을 택하면 된다.
키를 건네받고 시동을 건다. 이제부터 목적지는 정해진 노선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닿는 곳이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북쪽의 ‘사랑의 절벽(Two Lovers Point)’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서 광활한 태평양을 마주한다. 전망대는 이미 인생샷을 남기려는 한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괌이 망했다’는 소문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사랑을 맹세하며 채워진 수많은 자물쇠들은 인간의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염원들이다. 쨍한 오전 햇살 아래 펼쳐진 수평선은 운전대를 잡은 자에게만 허락된 시원한 시야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면 괌은 도시의 화장을 지우고 민낯을 드러낸다.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옥빛으로 빛나는 곳. 이곳의 물은 멈춘 듯 고요하지만,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생명이 순환한다.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따라 우마탁 마을에 닿는다.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이 처음 발을 디뎠다는 역사적 장소. ‘HUMATAK’이라는 거대한 글자 조형물 앞에서 여행자는 잠시 시간여행자가 된다.
괌의 최남단, 메리조 부두의 한적함은 셔틀버스로는 닿을 수 없는 고요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와 낡은 부두는 “더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파도가 화산암을 때려 만들어진 천연 수영장, 이나라한에서의 휴식은 자연이 인간에게 내어주는 가장 거친 형태의 배려다.

긴 드라이브의 끝, 4번 국도 자락에서 만난 ‘제프스 파이러츠 코브(Jeff’s Pirates Cove)’는 단순한 식당이 아니었다. 식당 안은 다양한 언어로 채워져 있었다. 옆 테이블의 미국인 가족, 건너편의 유럽인 커플이 즐기는 여유로운 식사를 보며, 이곳이 여전히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휴양지임을 실감한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완주한 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 같은 치즈버거. 두툼한 패티에서 터져 나오는 육즙은 드라이브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준다.
하루는 느긋하게 흐름에 몸을 맡기고, 또 하루는 나의 의지로 흐름을 거스른다. 정적인 휴식과 동적인 탐험이 교차할 때 비로소 우리는 괌이라는 섬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운전대를 놓는 용기와 다시 잡는 열정, 인생도 여행도 결국 이 두 가지 속도의 조화가 아닐까. socool@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