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문인들의 예술적 혼 담은 지조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비극…절망 끝에 만난 희망
특유의 서정적 가사·절절한 멜로디…거울 속 상반된 심리
2월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순수했던 사랑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적 결말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사랑의 양면성으로 빚어진 비극을 화해로 승화시킨 뮤지컬 ‘팬레터’는 마지막 포옹에 온기를 담는다.
1930년대 문인들의 러브레터 ‘팬레터’가 4년 만에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왔다. 절제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고요한 아름다움과 격정적 흥분으로 심장을 때린다.
‘팬레터’는 일제강점기, 김유정과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의 모임 ‘구인회’의 일화에 상상력을 더해 창작된 팩션 뮤지컬이다. 천재 소설가이지만 폐병으로 죽어가는 소설가 ‘김해진’과 문학을 사랑하는 순수 청년 ‘정세훈’ 그리고 또 다른 자아 ‘히카루’의 이야기를 통해 문인들의 예술혼과 사랑을 매혹적으로 그린다.
작품은 2016년 초연 이후 2018년 한국 창작 뮤지컬 최초로 대만에 진출, 이후 일본·중국 무대에 오르며 현지의 권위있는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홍콩 영화 감독 양가위는 “영화로 만들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라며 상업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완성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올해 다섯번째 시즌을 맞은 ‘팬레터’에는 초연부터 함께해온 배우들과 뉴 캐스트가 새로 단장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마지막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남은 인생을 불태우는 ‘해진’ 역에는 에녹·김종구·김경수·이규형이 연기한다. 그를 동경하는 ‘세훈’ 역은 문성일·윤소호·김리현·원태민이 연기한다. ‘세훈’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인 광기 어린 뮤즈 ‘히카루’ 역은 소정화·김히어라·강혜인·김이후가 맡는다. 칠인회의 ‘이윤’ 역 박정표·정민·이형훈·김지철, ‘이태준’ 역 이한밀·김승용·김지욱, ‘김수남’ 역 이승현·손유동·장민수·김태인, ‘김환태’ 역 김보현·송상훈이 출연한다.

◇ 격정적 심리를 매혹적으로 담아낸 ‘국어 교과서’
대한민국이 일제의 통치를 받던 암흑기, 조선의 민족의식을 억누르기 위한 무단통치 강화되면서 문화까지 지배받았다. 우리말인 한글로 글 쓰는 것조차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하는 시대였다. ‘팬레터’는 예술마저 검열당했던 문인들의 절절한 외침을 상상 속 뮤즈의 펜을 통해 해소한다.
‘팬레터’는 실제 김유정의 ‘고향’ ‘생의 반려’, 이상의 ‘AU MAGASIN DE NOUVEAUTES’ 등이 스며있다. 서정적인 문학적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진 서스펜스 드라마로써 숨을 불어넣어, 마치 한 편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하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음을 덧붙인 시적인 대사·가사, 단조와 장조를 넘나들며 음양의 이치를 표현한 아름다운 멜로디가 섬세한 스토리 속 웃음과 슬픔, 사랑과 고통의 공존을 형성한다.
작품의 계절적 배경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히카루’의 생일인 3월4일로 시작해 죽음의 문턱에 선 ‘해진’의 3월17일에 머문다. 봄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동시에 뜨거운 여름으로 가는 마지막 달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는 새싹이 돋는 순간과 같다. 특히 일제-전후 격동기에는 희망·재생·청춘의 상징적 의미로써 창작의 원천이 됐다.
1막과 달리 감정의 깊이가 고조되는 2막은 피치카토(현악기를 손가락으로 튕겨 음을 내는 연주법)와 빠르게 몰아치는 16분음표 템포의 향연에 인물의 내면과 음색을 더해 감정선의 절정을 이룬다. 인물에 흡수된 안무와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는 비로소 하나의 음악을 완성해, 가려진 이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극도의 긴장감을 일으킨다.

◇ 비극으로 치달은 소유욕…용서의 완성 이루는 ‘사랑의 힘’
작품 속 ‘해진’과 ‘세훈’ 그리고 ‘히카루’는 12세기 프랑스의 시대상과 철학, 사랑에 대한 인식을 생생하게 담아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로 그려진다. 서로 사랑하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 맞닿는다.
‘팬레터’는 이들의 삶에서 억압의 시대에 문학을 지키려는 문인들의 강한 열망을 노래한다. 폐병으로 죽어가지만, ‘히카루’의 존재만으로 하루를 더 살아가는 ‘해진’의 모습에서 일제의 문화통치에 저항성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의 양면성은 거울로 비친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팬레터는 ‘히카루’의 흑화로 통제할 수 없는 어둠에 빠진다. 그러나 ‘해진’이 죽기 전 ‘세훈’에게 남긴 넘버 ‘해진의 편지’에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편지의 주인공을 ‘그녀’라고 말하지만, “그게 누구라도”라며 한결같이 답장을 기다리는 ‘그(세훈)’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다.
‘세훈’의 내면에 숨겨진 문학적 욕망과 천재성이 의인화된 허상의 ‘히카루’는 ‘해진’의 생명을 재촉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세훈’은 결국 펜촉으로 예술혼을 끊는다. 하지만 ‘해진’의 사랑과 용서를 통해 회피하던 본인을 다시 끌어안고 진정한 문인의 길을 걷는다. 아픈 역사 속 문인들이 지킨 예술적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1930년대 문인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상상으로 구현한 ‘팬레터’는 오는 2월22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