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팬데믹이 찾아오자 영화관이 멈췄다. 극장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국내 대중은 전염의 두려움으로 영화관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췄다. 영화관은 90% 이상 손실을 봤다. 배급사는 신작을 내놓는 걸 멈췄다. 악순환이 반복됐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팬데믹 시기엔 사실상 전 세계 영화 산업이 중단됐다.

영화인들 사이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는 의문부터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도 던졌다. 김지운 감독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영화란 자신에게 어떤 것인지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영화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됐던 때를 돌이켜보게 됐다.

그러던 중 배우 송강호를 통해 신연식 작가가 쓴 ‘거미집’ 각본을 알게 됐다. 영화란 매체를 고민하던 차, 그에 딱 들어맞는 시나리오와 만나게 된 것. 마치 운명처럼 연결됐다. 하지만 ‘거미집’은 기획 자체가 쉽지 않은 예술 영화에 가깝다. 아무리 좋은 배우를 모셔 와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김지운 감독은 지난달 21일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소재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읽고 어떻게든 내가 해보고 싶었다. ‘죽은 시나리오 내가 잘 살려낸다’고 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실제로 ‘악마를 보았다’도 투자가 잘 안됐다. 그래도 하드보일드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나. 이 영화를 꼭 영화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팬데믹 이후 회복하지 못하는 韓영화계 꼭 필요한 영화 확신

영화의 주인공 김열(송강호 분) 감독은 신상호(정우성 분) 감독의 아류라는 세상의 평판을 잠재우고 싶어한다. 그는 막 촬영을 마친 치정극 ‘거미집’의 일부를 바꾸면 걸작이 탄생할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김열은 제작사와 정부, 배우들을 설득해가며 자신이 원했던 장면을 찍으려 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담은 작품이 ‘거미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한 영화감독의 예술적, 대중적 성공을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에 대한 저의 소회와 성찰을 반영할 수 있는 영화가 ‘거미집’이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었죠. 팬데믹 이후 유독 한국이 회복력이 늦어요. 미국이나 일본은 회복단계인데, 아직 한국은 예전만큼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국 영화계에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김지운 감독은 김열에게 자기 내면을 담았다. 예술적인 욕망에 지배된 독특한 인물 같지만, 제작사와 배우, 공무원을 만날 때 그는 마치 영업사원처럼 변모했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자신이 원하는 걸 이뤄나갔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고 크게 괴로워했다.

“그래도 비교적 감정의 동요가 적은 편이지만 저도 촬영장 안에서는 미친놈처럼 변해요. 시한폭탄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불안하지 않은 척을 하긴 하죠. 현장에서 진퇴양난을 겪고, 찌그러지고 뒤틀리는 순간이 있어요. 어떤 날은 천재 같고, 어떤 날은 스스로가 쓰레기 같아요. 비탄에 빠지고 고통스럽고. 이런 폭풍우를 꼭 현장에서만 느껴요. 그건 내가 살아있는 걸 느낀다는 거죠. 현장은 제게 황홀한 시간이죠.”

◇OTT개봉 유혹 있었지만 극장 개봉 고집, 영화인 자존심 지켜

주로 장르물 위주의 작품에서 이름을 떨친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은 ‘조용한 가족’이다. 호러와 코미디가 독특하게 섞인 앙상블 코미디다. 말맛이 살아있는 배우들의 대사로 웃음을 주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거미집’도 마찬가지다. 다만 김지운 감독의 색감이 더욱 짙게 배어있다.

“저는 맨숭맨숭 이런 거 저런 거 안배하지 않아요. 제 개성을 세게 집어넣는 편이에요. ‘거미집’도 대중성 확보 면에서 결핍된 게 있을 수 있어요. 그래도 새로운 영화를 찾는 관객은 있을 거라 봐요. 나름대로 대중적인 접근법을 많이 생각하면서 만든 결과물이거든요. 영화의 자존심은 지켰다고 생각해요.”

영화관이 문을 닫을 정도로 위기에 처했을 때, 신흥 플랫폼으로 등장한 것이 OTT 플랫폼이다.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 예능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가 안방 TV를 통해 공개되곤 한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한 대형 작품도 OTT에서 구현된다. 사실상 영화관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한다. ‘거미집’도 OTT에서 공개될 뻔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어려운 기획이잖아요. OTT 유혹이 있었어요. 거기서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유혹됐죠. 그래도 영화 이야기인데, 어렵고 힘들더라도 영화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존심을 지킨 거죠. 김열처럼 저도 꿋꿋하게 밀어붙였어요.”

◇“제 영화를 본 관객들의 인생이 더 나아지길 바라며”

영화 후반부 김열은 ‘플랑세캉스’를 강조한다. ‘롱테이크’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한 신을 끊지 않고 찍는다는 의미다. 김열은 “플랑세캉스를 해야 한다”며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의심하면서도 일단 받아들였다.

“플랑세캉스는 일종의 맥거핀 효과(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죠.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것 아닌. 그리고 또 하나가 김열의 욕망이에요. 김열은 이류 감독을 탈피하려는 욕구가 강하잖아요. 그래서 영화인의 전유물에 가까운 단어를 끄집어내서 예술 감독의 비전을 제시하는 거죠. 그런 악조건에서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죠.”

김 감독은 김열이 플랑세캉스를 강조하는 건 현장에서 본 자신을 담기 위해서라고 했다.

“감독이 자주 부딪히는 게 ‘왜 굳이 그렇게 찍어?’라는 스태프들의 의견과 제 욕심이 상충해서 그래요. 전 해야 할 것 같거든요. 이런 지점이 부딪혀요. 그게 그 사람의 독창성이고 오리지널리티예요. 그걸 밀고 나가는 게 김열 감독이죠. 한편으로는 재능이 없는지 의심도 하고요. 저도 현장에서 ‘나만 애쓰고 있나?’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반대로 감동을 얻기도 하죠. 그러다가 스태프와 배우들이 초긴장 몰입을 통해 어려운 걸 해냈을 때 희열이 강렬하죠. 저도 그 장면을 플랑세캉스로 하고 싶었어요.”

‘거미집’은 누군가는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겠지만, 김 감독의 진심을 아는 관객에겐 잊을 수 없는 영화기도 하다. 스크린 가득 찬 예술가의 고뇌가 뭉클함을 안긴다.

“영화감독으로 최종적으로 듣고 싶은 말은 ‘당신 영화를 보고 내 인생이 좋아졌다’라는 말예요. 관객이 제 영화를 보고 ‘저런 영화 만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며 자기 단련의 시간을 확장하는 거죠. 제가 그랬어요.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보면서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려고 했던 거요. 그런 에너지와 희망을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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