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배구 흉내만 냈을 줄 알았다. 신파로 이야기를 끌고 갈까 싶었다. 걸출한 배우와 ‘동주’(2016)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까지 붙었지만, 국내 최초 배구 영화 ‘1승’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국가대표’(2009) 이후 반복된 스포츠 영화 기시감 탓이었을 테다. 기우였다. 107분간 배구로 우직하게 몰아붙이는 ‘1승’이 전하는 랠리에 짜릿한 전율이 올라왔다.
오는 4일 개봉하는 ‘1승’은 파직, 파면, 파산 등 패배 인생으로 점철된 감독 우진(송강호 분)이 ‘1승’에 상금 20억 원을 건 괴짜 구단주 정원(박정민 분), 전패 위기에 처한 여자 배구 선수단 핑크스톰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배구 영화’라는 기본기에 충실하다. 박진감 넘치는 배구 랠리를 스크린에 제대로 구현했다. 두 달 동안 안무 연습하듯 한 랠리 시퀀스가 기막히다. 좌우로 넓게 퍼진 코트 위 TV 중계 화면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스카이 서브 이후 상대 팀 리시브, 세터 볼 배합, 스파이커 마무리 등 360도 카메라로 입체감 있게 구현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스카이 워커(사축 와이어캠)가 경기장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누비는 장면은 경기장에 들어가 있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신 감독은 “와이어 캠에 카메라 6대를 달았다. 카메라 포지션을 입력해 카메라가 360도로 배우들을 다 찍었다”며 “며칠에 걸쳐 여러 차례 리허설이 필요했던 난이도 높은 장면이었지만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다”고 전했다.
이런 기술이 빛이 난 건 실제 프로처럼 연습한 선수들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주장 수지 역을 맡은 장윤주를 비롯해 이민지, 신윤주, 시은미, 장수임, 차수민, 송이재 등 16명 배우가 수개월간 개인 트레이닝을 했다. 4박 5일간 전지훈련도 했다. ‘1신’을 위한 담금질이었다. 장윤주는 “하루 종일 배우들과 모여서 운동하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머물며 진짜 선수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1승’은 앞서 실패한 스포츠 영화 문법을 벗어났다. 눈물 빼는 서사를 덜어냈다. 배구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위에 감동을 얹었다.
우진은 무능했지만, 각성한다. 상대 팀 슈퍼걸스 감독(조정석 분)에게 비디오 기술 분석을 배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포지션별 필요한 동작을 섬세하게 구분하고 전략과 전술을 짜기 시작한다. 상대 팀 에이스 ‘쿠세’(나쁜 버릇)를 알아본다. 세터 볼 배합을 바꾸고 백어택(후위 공격)까지 능수능란하게 해내며 한 세트씩 따내기 시작한다.
‘이기는 맛’을 점점 알아가는 우진과 핑크스톰은 잿빛같던 코트를 흥분이 넘치는 분홍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슬램덩크’ 마지막 장면처럼 하얗게 불태운 마지막 시합은 각종 작전으로 흥미를 배가한다. 배구 팬들이 좋아할 레전드 김연경·신진식·김세진을 보는 재미도 있다.
‘동주’(2016)에서 흑백 모노톤으로 서정적 서사를 만든 신 감독은 이토록 빠른 영화에도 캐릭터마다 숨결을 불어 넣었다. 독립운동가 송몽규로 세상 무겁던 박정민은 깃털보다 가벼운 재벌 3세 역을 멋들어지게 해냈다. 가볍지만 무거운 ‘1승’을 해내려는 구단주 정원은 절대 밉지 않다.
영화 ‘거미집’(2023) 디즈니+ ‘삼식이 삼촌’(2024)으로 다소 짓눌려 있던 송강호는 ‘1승’에서 마침내 ‘넘버3’(1997) 때처럼 다시 수면 위로 펄쩍 튀어 올라왔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