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아무리 영화 ‘파묘’(2024)가 1191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오컬트 장르는 여전히 마이너 영역이다. 게다가 구마를 진행하는 수녀라는 설정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도 미지수였다. 아무리 송혜교가 출연하는 작품이라고 하지만, ‘검은 수녀들’에 대한 우려는 분명히 존재했다.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100만을 돌파했다. ‘겨우 100만’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수치다. 최근 국내 영화 중 100만 고지를 넘은 작품은 손에 꼽는다. 긴 연휴 기간은 해외 여행객이 늘어나 오히려 영화 관람객이 줄어드는 악재도 번번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더욱 커다란 성과다. 일일 20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는 ‘검은 수녀들’이 관객들에게 통한 비결을 짚어봤다.

◇담배 연기 머금은 송혜교, 처연한 얼굴로 만든 설득력

어둑한 공터, 한 여인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유니아(송혜교 분) 수녀다. 유니아가 연기를 쭉 내뱉고 성큼성큼 걸어간 곳은 악령이 씐 희준(문우진 분)의 구마 현장이다. 듣기 거북한 악담을 쏟아내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광기 어린 눈을 쏘아대는 희준 때문에 모두가 하얗게 질려 있다.

혼돈의 현장에서 태연한 건 유니아 뿐이다. 불과 5분이 넘지 않은 시간에, 송혜교는 회색빛 무표정으로 유니아가 가진 굴레 가득한 인생을 단번에 표현한다. 캐릭터 세팅을 마치자마자 영화는 질주한다. 편견에 부딪히고, 나약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어떤 권위도 권력도 없는 수녀의 발버둥이 현실을 반영하냐는 질문이 나올 법 하지만, 영화 내에선 그럴듯하다. 이 역시도 송혜교의 강인한 에너지가 작동했다. 대차고 당당하게 말하는 몇 몇 장면에선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구마가 이뤄지는 하이라이트와 마지막 결정적인 엔딩에도 송혜교가 있다. 악령을 몰아세우는 부분에서 긴박감을, 숭고한 희생을 위해 걸어가는 뒷모습에선 뭉클함이 전달된다. ‘더 글로리’ 이후 커다란 성장을 이룬 송혜교의 힘이 오롯이 느껴진다.

◇결핍을 극복한 두 여성의 연대, 드라마도 짙다

오컬트 장르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패턴이 많다. ‘검은 수녀들’의 차별점은 두 여성의 연대를 담아냈다는 점이다. 그 어느 분야보다 보수적인 종교계는 여성의 능력을 깎아내리는데 익숙하다. 아무리 구마에 능력이 탁월한 유니아라도 번번이 무시와 조롱을 견뎌야 한다.

희준을 살려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유니아가 발견한 인물은 자신과 같은 귀태인 미카엘라(전여빈 분) 간호사다. 귀태는 태생부터 무당이 될 팔자라는 의미로, 귀신을 듣고 보는 존재를 일컫는다. 귀태를 받아들이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유니아와 아직 귀태라는 것을 거부하는 데 애쓰는 미카엘라가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대목이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가 된다.

서사를 폭넓게 쌓는 과정에서 오컬트의 빠른 전개와 달리 다소 느려지는 지점이 있긴 하나, 결국 진하게 쌓은 감정선이 후반부 큰 감동으로 몰려온다.

◇전여빈·김국희·신재휘·문우진, 송혜교만 전부가 아니다

송혜교가 깊은 얼굴로 영화의 중심을 잡은 덕분에 진한 빛으로 발광하는 건 옆에 있는 동료 배우들이다. 소극적이고 불안에 떠는 미카엘라 역의 전여빈, 신내림을 받은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 무당 역의 김국희, 말더듬이 애동 역의 신재휘, 이 영화의 핵심 빌런 악령에 씌인 희준 역의 문우진이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다.

대체로 주체적인 인물을 맡아온 전여빈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귀태임에도 귀태를 받아들이지 못해, 오히려 노심초사 살아가고 있는 간호사다. 답답할 정도로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만, 유니아를 만나 점점 넓은 사랑과 이해를 갖게 된다. 복잡하고 현란한 이야기 속에서 미카엘라의 성장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낸 건 전여빈이다. 이번에도 또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퍼포먼스다.

독특한 캐릭터를 잘 소화하기로 정평이 난 김국희는 아우라가 넘치는 무당으로 분했다. 황정민과 김고은의 뒤를 잇는 굿신에서 그가 보여준 힘은 상당히 강렬하다. 앞선 배우들이 동적인 분위기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표출했다면, 김국희는 모든 에너지를 응축해 은은히 뿜어냈다. 여운이 깊은 굿판이다.

신재휘는 기술이 좋았다. 도대체 얼마나 연습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말더듬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과잉된 설정임에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여러 작품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신재휘, ‘검은 수녀들’ 이후 K-콘텐츠의 주역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된다.

또 하나의 보석을 발굴했다. 희준 역을 맡은 문우진이다. 악령에 씌었을 때 폭발력이 있는 광기를 표현할 뿐 아니라 후반부 기억에 깊게 남을 분노의 눈을 뿜은 문우진은 새로운 실력파 배우다.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잘 쓸 뿐 아니라, 감정 연기도 탁월했다. 영화 내 가장 중요했던 인물, 문우진이 해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