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뮤지컬의 절제된 연출의 미학
클래식과 문학의 집합체…뮤지컬 속 오페라 완성
한 달만 허락된 시간…3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신사 숙녀 여러분, 규칙 지켜요. 그래야 신의 심판 피할 수 있지요. 돌아오는 열차표는 없을 겁니다. 모두 저곳으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넘버 ‘프롤로그’ 중)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2019년 재연 이후 7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 레프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세기 후반 러시아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과 고뇌, 열망과 갈등의 비극을 섬세하게 그린다.
이번 시즌을 위해 알리나 체비크 연출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월드 클래스 창작진이 직접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서도 최정상 배우들이 함께 호흡해 개막 전부터 화제작으로 주목받았다.
고위 관료의 부인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을 만한 매력적인 귀족 부인이자 사랑과 비극을 오가는 ‘안나 카레니나’ 역에는 초연의 옥주현을 비롯해 김소향과 이지혜가 이름을 올렸다. 전도유망한 매력적인 외모의 젊은 장교이자 ‘안나’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알렉세이 브론스키’ 역은 윤형렬·문유강·정승원이 맡는다. ‘안나’의 남편이자 러시아 정계의 주요 고위 관료로서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알렉세이 카레닌’ 역에는 이건명과 민영기가 무대에 오른다.

◇ 인간 내면에 숨긴 복잡한 감정을 휘감은 사랑의 찬가
‘안나 카레니나’는 국내 최대 규모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총 3022석)을 매회 흥행 기록을 새롭게 쓰며 화려한 귀환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7년 만의 재회라고 하지만, 미국 브로드웨이 또는 영국 웨스트엔드의 작품 분위기에 익숙한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특히 러시아 특유의 철학적 메시지가 음악과 대사에 버무려져 복잡한 감정이 더욱 혼란스럽다.
방대한 장편소설인 데다, 많은 인물과 복합적인 서사를 150분 무대로 압축했다. 앞서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지만, 무대 위 안나와 브론스키, 카레닌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의 함축적 표현은 인물 내면 묘사 자체부터 다르다. 인물들의 앞뒤 사정을 모르고 공연장을 찾는다면 막연한 기대에만 머물게 된다.
알리나 체비크 연출은 배우들에게도 “글로써 많이 상상하라”고 주문했다. 옥주현 역시 “3권의 책이 소화 안 되는 비주얼이지만, 작가가 왜 이 소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는지 인문학적으로 이해를 돕는다”라고 추천했다.
작품은 단순히 남녀의 불륜이나 마녀사냥, 막장 드라마의 재미가 아니다. 인간이 갈망하는 소유와 체면에 의한 소외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기관차처럼 끓어오르는 서사적 진폭
마치 뮤지컬 속 오페라를 보는 듯하다. 2막에서 패티(한경미·강혜정)의 아리아가 강렬하지만, 작품의 희로애락을 끊임없이 전하는 음악의 힘이 가슴을 눈물로 적신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힘으로 황폐해지는 안나를 위로의 선율로 감싼다.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되뇐다. 인간 내면의 고뇌와 갈등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통해 진정한 해방을 향해 전진한다.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 역시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이다.
이같이 러시아 특유의 철학적 메시지는 화려한 세트나 특수효과 대신 빛과 그림자,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정형적인 웅장한 오케스트라에 물든 넘버들은 마치 오페라의 레치타티보처럼 전개돼 깊은 울림을 남긴다.

◇ 같은 하늘 아래 다른 감정처럼…절제된 감정을 토해내는 한 편의 서사시
뮤지컬의 3대 주요 요소가 노래, 춤, 연기라면 ‘안나 카레니나’는 무대 연출, 영상/조명, 앙상블이 미장센을 완성한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러시아의 농도 높은 예술과 철학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무대는 기차역에서 시작해서 끝난다. 폭주하는 기관차같이 이들의 운명에 경적이 울린다. M.C.(박시원·김도현)의 퍼포먼스가 비극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안나의 죽음을 후련한 아름다움으로 감싸 안는다. 첫 만남의 기차역은 불길한 징조라고 경고하지만, 최후의 순간은 애통한 심정을 빛으로 씻어낸다.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은 조명으로써 양날의 검처럼 번진다. 빨강과 파랑의 색이 짙게 물들면서 파멸로 치닫는 금지된 사랑을 예고한다. 불같이 타올랐던 사랑은 거미줄처럼 얽혀, 가질 수 없어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눈 내리는 스케이트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피겨스케이팅, 빛나는 샹들리에보다 감탄스러운 발레와 왈츠 등은 러시아 예술 미학의 총집합체를 보여준다. 초대형 무대를 가득 채우는 앙상블의 퍼포먼스는 단순한 군무가 아닌 과거를 현재 시점에 맞춰 각색된 예술의 경지로 격상시킨다. 특정 장면에서의 스톱모션과 서로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 시선들을 따라가면 인물들의 심리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서사시 ‘안나 카레니나’는 3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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