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11일 오후 7시, 고요하게 흐르던 민요 가락이 일순간 멎었다. 6만 명의 숨소리조차 삼켜버린 묵직한 적막. 검은 두건을 쓴 인영(人影)이 붉은 성화로 대형 스크린 속 ‘아리랑’ 글귀를 불태웠다. 함성과 함께 수십 명의 검은 무리가 무대를 장악했고, 핏빛 조명 아래 방탄소년단(BTS)이 서서히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왕좌를 노리는 자들을 처단하러 온 암살자 같은 서늘한 귀환이었다.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BTS 월드투어 ‘아리랑’ 둘째 날, 오프닝은 심장을 짓이기듯 둔탁한 힙합 베이스의 ‘훌리건(Hooligan)’이었다. 6년 반의 군백기와 팬데믹의 억압을 뚫고 귀환한 이들은 “무대를 완전히 때려 부수겠다”는 맹렬한 선전포고로 거대한 폭동의 서막을 열었다.

◇두려움의 예술적 승화를 이은 화합과 연대
셋리스트는 그 자체로 BTS의 서사였다. 오프닝 3연곡으로 세상을 뒤집어놓겠다고 선언한 BTS는 이어진 무대에서 어두운 내면과 직면했던 고통의 시간을 밀도 있게 표현해 냈다. 기나긴 공백 사이에서 느낀 두려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무대였다.
이후 ‘노멀(NORMAL)’로 어둠을 걷어낸 이들은 ‘불타오르네(FIRE)’와 ‘마이크 드랍(MIC Drop)’ 등 압도적인 히트곡을 쏟아내며 두려울 것 없이 전진하겠다는 맹수 같은 카리스마를 표출했다.

고뇌를 찢고 나온 서사는 ‘화합과 연대’로 치달으며 정점을 찍었다. 팬덤 아미(ARMY)와 호흡한 ‘바디 투 바디(Body to Body)’ 무대에서 이들은 앞뒤도, 계급도 없는 ‘강강술래’ 퍼포먼스로 거대한 평등의 원을 그렸다. 연대의 온기를 품은 채 곧바로 메가 히트곡 ‘IDOL’로 넘어간 멤버들은 무대 밖 육상 트랙으로 튀어나와 대형 퍼레이드를 펼치며 아티스트와 관객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이어진 ‘버터(Butter)와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거칠고 깊은 감정에서 벗어나 그간 사랑받았던 자신들의 ‘밝고 빛나는 모습’을 함께 즐기자는 손길을 건넸다.
◇무의식적 능숙함으로 빛낸 ‘통제된 자유’
이 거대한 서사를 납득시킨 건 방탄소년단의 인간계를 넘어선 무대 소화력이었다. 6만 명의 관객 앞에서 이들의 눈빛에는 1초의 긴장이나 조급함이 없었다. 이른바 ‘통제된 자유’였다. 질서 정연한 칼군무 속에서도 7명 멤버의 스웨그가 제각기 빛났다. 다음 동선을 의식하는 0.001초의 버퍼링조차 없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기 때문일까, 수만 시간의 훈련이 뇌의 의식을 벗어나 몸의 세포에 완벽히 체화된 ‘무의식적 능숙함’이 러닝 타임 내내 발현됐다. 무질서한 듯 자유롭게 뛰어노는 이들의 모든 궤적이 곧 완벽한 정답이었다.

리더 RM은 “여기까지 다시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많은 변화를 보여드리고 있지만, 7명이 이 일을 같이하기로 했다는 점,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진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가득 채워주신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겠다”고 비장한 얼굴을 드러냈다.
RM의 말처럼 BTS는 기나긴 공백기 동안 축적된 내공과 진정성을 6만 관객 앞에서 날것 그대로 증명해 냈다. 1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은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전 세계가 왜 다시 방탄소년단을 향해 보랏빛 환호를 보내고 있는지, 온몸으로 납득한 150분이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