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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한국 대중음악의 자존심’. 이 수식어가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만큼 어울리는 팀이 또 있을까.
봄여름가을겨울은 지난 25일 열린 ‘한국방문의해 기념 제27회 하이원서울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이 팀이 1980~2000년대 이룬 업적과 성과들을 감안하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수상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80년대 가요계의 대표적인 ‘아이콘’ 조용필, 김수철, 故 김현식, 故유재하와 음악적 인연을 맺고 함께 호흡 했었고, 이후 퓨전재즈, 훵크(Funk) 등 흑인음악을 가요에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악으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30년의 경력 동안 그들의 성과물들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다닌다. 치열한 음악적 고민과 실험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는 방증이다.
지난 1월 중순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전태관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김종진과 데뷔 30주년을 맞은 봄여름가을겨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틀간, 총 4시간에 걸쳐 나눴다. 첫날 만나서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추가 인터뷰는 다음날 전화로 1시간 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인터뷰②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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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국내 최초의 본격 라이브 앨범 ‘봄여름가을겨울 Live’ 발매
더블앨범에 라이브 앨범 임에도 8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라이브 앨범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라이브 앨범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80만장이 팔렸는데 더블앨범이니 실질적으로 160만장이 팔린 셈이다. 그때는 더블앨범이 없으니 재킷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소속사에서도 ‘100% 망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속사 대표가 하도 우리에게 당하니 “차용증을 쓰자”고 하더라. 그래서 돈을 빌려 우리가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훗날 이런 자료들이 소속사와 분쟁시 법적 증거물이 돼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오자 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모두가 “라이브 앨범은 아무도 안 들을 것이다”, “라이브 앨범을 만들 기술이 없으니 못 낼 것이다”, “신곡 없이 구곡을 재탕하는데 누가 사냐”고 했는데, 그런 편견을 깼다.
-국내에서 사실상 처음 라이브 앨범을 시도한 이유는,라이브 앨범을 내야 뮤지션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살아있는 거라 생각했다. 나는 대중이 늘 선생님이라 생각한다. 팬들은 아무도 안 만들어서 못 들었을 뿐 그런 라이브 앨범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제작자와 뮤지션은 몰라서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런 앨범을 듣고 싶은데 아무도 안하니 우리가 했을 뿐이다.
-라이브 앨범 녹음장비가 있었나.없었다. 방송국에는 중계 장비가 갖춰진 차가 있었는데, 방송국 사업이 아니라 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스튜디오 녹음 장비를 상당 부분 뜯어서 공연장에 들고 갔다. 라이브 앨범 제작에 필요한 기본적인 이해도, 장비가 없었기에 원하는 사운드가 100% 나오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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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국내 가수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앨범의 전 과정을 제작한 3집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 발매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적 변신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앨범으로 평가된다. 사진가 김중만의 뉴욕사진이 들어있는 10여쪽의 앨범속지가 포함돼 있다.
-미국에서 앨범 전체를 녹음하고 만든 이유가 있나. 제작비가 엄청났을 거 같다.제작비로 2억 5000만원을 썼다. 그무렵 제작비 4500만원만 써도 ‘미친놈’ 소리를 듣던 때였다. 소방차 등 인기 그룹이 그 정도를 썼는데 그건 작사 작곡 편곡 비용이 포함된 금액이다. 우린 작사 작곡 편곡비 없이 순수하게 스튜디오 렌탈 비용, 세션 연주료 등에만 그보다 5배를 더 쓴 것이다.
미국 밴드 스톤 탬플 파일럿 등이 이용해 당시 현지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 사이에선 꽤 유명했던 ‘애크미 스튜디오’(ACME STUDIO)를 2달 동안 통째로 빌렸다. 거길 통해 당시 뉴욕 맨하탄에 있던 ‘스털링사운드’라는 최고 수준의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애크미스튜디오에서 레코딩과 믹싱을 했고, 스털링사운드에서 마스터링을 했다.
-미국에서 전곡 녹음을 한 이유는.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는다는 생각으로 갔다. 스포츠 종목에 비유하자면 동네 권투 선수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경기를 치르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앨범이다. 이전까진 ‘외국 사람들은 이러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들을 직접 겪으며 시야가 무척 넓어졌다.
사람은 신념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사실 우리는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갔다. 미래에 대한 공포심이 굉장했다. 나와 전태관은 이 앨범을 내고, 굶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갔던 거다. 나와 전태관의 오랜 꿈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세상엔 이룰 수 없는 꿈도 많은데, 우리의 마지막 꿈은 무대 위에서 연주하다 죽는 거였다.
-3집도 흥행적으로 굉장히 성공을 거뒀다.앨범 판매가 잘됐다고 들었다. 몇장이 팔렸는지는 소속사에서 알려주지 않아 정확히 모른다. 3집 앨범을 낸 뒤 기획사 대표가 예전 대형 백화점 사주가 살던 대저택을 샀다. “봄여름가을겨울 덕분에 샀다. 고맙다”고 해서 알았다.
나중에 한 음원사이트가 예전 도매상 협회 집계 등을 정리한 기록을 통해 알게 됐는데 우리 3집이 92년 가요 앨범 전체 판매량 1위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보다 많이 팔렸다고 하더라.
-봄여름가을겨울 이후 미국에 가서 녹음하는 뮤지션들이 생겼다.우리 이후에도 10년간은 흔치 않았다. 이승환, 이승철 정도가 미국에서 앨범을 만들었다. 돈이 정말 많이 든다. 계산을 하면 절대 미국에서 앨범을 만들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승환, 이승철도 대단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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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4집 앨범 ‘아이 포토그래프 투 리멤버(I Photograph to Remember)’ 발매
3집에 이어 미국에서 작업한 앨범. 4집은 음악적으로 완벽한 소리를 전하려는 시도를 한 앨범으로 평가된다.
-3집에 이어 4집도 미국에서 제작했다.3집과 마찬가지로 2억 5000만원 가량을 썼다. 재킷도 뉴욕에서 만들고, 디자인도 미국에서 했다. 앨범 안에 대형 포스터를 접어서 넣었는데 미국 디자이너가 사용하라는 별색을 우리나라에서 어떤 업체도 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지를 모두 미국에서 인쇄해 국내 공수해왔다. 당시 앨범 개당 제작비가 1000~1100원 정도였는데 그 종이 한장 제작에만 1000원이 들었다. 그래도 타협할 수 없었다. 추가 비용은 우리가 내겠다고 하면서 앨범을 만들었다.
음악적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그 당시 최선의 것을 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했던 시기다. 나중에 배운 것들을 당시엔 몰랐던 게 너무 많다.더 귀를 더 열어야 하는 시기인데 너무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기도 하다.
-판매량은 어땠나.기획사 대표 얘기로는 3집에 비해 반의 반도 안나갔다고 하더라. 약간 흥행이 꺾인 시기였다. 좋은 분들과 음악하는데 내 고집이 너무 세면 주위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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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집 ‘미스터리’ 발매
15곡을 수록. “We wanna go back to the past”라는 메시지를 담은 모르스 신호로 시작하는 앨범이다. 신중현의 곡을 리메이크한 ‘미인’이 히트했다.
-5집에 대해 설명해 달라.5집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상업적인 부분을 넣어보는 실험을 했다. 당시 기획사 대표가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니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이 안 움직이면 안되니 모르스 부호를 넣었다. 우리 음악을 하기 전 시대로 돌아가 어릴 때 좋았했던 음악을 해보자는 의도였다. 리메이크 곡도 하고, 복고적인 옛날 느낌을 살리는 선곡을 했다.
-공교롭게 봄여름가을겨울이 만든 노래들이 아니라 신중현의 ‘미인’ 리메이크가 이 앨범에서 가장 히트했다.그 앨범에서 큰 실수한 게 실제 현악기 대신 기계로 스트링 연주를 한 것이다. 미디로 하니 느낌이 안 살더라. 음악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앨범은 처음으로 제작비를 생각하며 만들었다. 기획사 대표에게 돈을 적게 빌려 앨범을 제작했다. 대표 몫으로 많은 돈이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처럼 안되더라.
그 앨범에서 히트할 거라 생각한 노래는 안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미인’ 리메이크만 잘됐다. 분명 대중성을 고려하면 성공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나는 그런 척 하면 안되겠더라. 나는 고민하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대중성을 신경 안쓰면 잘되고 신경 쓰면 안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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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집 ‘바나나 셰이크’ 발매
국내 최초로 CD케이스를 깡통형식으로 만들었고, 노래 외에 부가 영상 등을 담은 확장 CD(Enhanced CD) 앨범이다. 故신해철, 이현도, 이소라 등 후배가수들이 참여했다.
-6집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우리 인생 희대의 역작이면서 봄여름가을겨울 앨범 중 가장 저평가된 앨범이다. 그 앨범이 저평가된 건 안타깝다. 너무 너무 안타깝다. 지금 들어도 음악이 좋다. CD플러스(뮤직비디오, 사진작가 김중만의 인물사진, 노랫말 수록)라는 새로운 개념도 도입했다. 메시지도 좋았는데 안되더라. 그땐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 대중이 여기는 좋은 음악의 기준이 흔들리고, 바뀌던 시기다.
1,2집에 이어 5집 재킷도 만들어줬던 서도호가 다시 앨범 아트 워크를 했다. 자신은 원래 그림이 아니라 설치 미술 쪽이라고, 깡통으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해체와 재구성’ 등 내가 못 알아들을 얘기를 하면서 깡통에 통조림처럼 씨디를 넣자고 했다.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통조림처럼 좋은 음악은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 한 사람을 살릴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었다.
monami153@sportsseoul.com
<봄여름가을겨울이 25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펼쳐진 한국방문의해 기념 ‘제27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시상식(주최 스포츠서울, 주관 서울가요대상 조직위원회)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