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내가 꿈꾸는 내세의 천국은, 그 무대가 언제나 파리 리츠 호텔이다.” (When I dream of afterlife in heaven, the action always takes place in the Paris Ritz.)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남긴 이 말은 ‘리츠’가 단순한 호텔이 아닌, 한 시대의 문화이자 욕망의 정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곳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밤은 부드러워’의 무대로 삼아 ‘재즈 시대’의 화려함을 그려낸 곳이자, 코코 샤넬이 30여 년간 ‘집’이라 부르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무른 상징적인 공간이다.

1898년, 파리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방돔 광장(Place Vendôme)에 문을 연 리츠는 ‘호텔의 왕’이라 불린 세자르 리츠(César Ritz)의 야심작이었다. 런던 사보이(Savoy)의 초대 총지배인으로 이미 명성을 떨친 그는, 단순히 잠자는 곳이 아닌 귀족의 대저택처럼 우아하고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의 철학은 “고객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The customer is never wrong)”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현대 서비스 산업의 기준을 세운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사보이가 전기 조명과 엘리베이터라는 ‘기술적 혁신’의 상징이었다면, 리츠는 ‘럭셔리한 삶’ 그 자체를 디자인했다. 그는 호텔업계 최초로 모든 객실에 개인 욕실을 설치했다. 단순히 용무만 보는 옷장(W.C.)이 아닌, 온전한 휴식이 가능한 진짜 ‘욕실(Bathroom)’을 설계한 것이다.

또한 귀족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복도에는 발소리를 완벽히 흡수하는 두꺼운 카펫을 깔았다.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해 눈부신 직접 조명 대신 은은한 간접 조명을 도입했다. 왕족과 거부, 당대 스타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완벽한 동선을 구현한 것이다.

이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는 곧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와 지식인들을 끌어모았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장 폴 사르트르 등 1차 세계대전 후 환멸을 느낀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리츠의 바에 모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다.

특히 코코 샤넬에게 리츠는 단순한 호텔이 아니었다. 그는 길 건너편 캉봉가 31번지의 부티크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2층 스위트룸에서 1971년 숨을 거둘 때까지, 30여 년간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리츠는 그의 패션 제국을 지휘하는 사령부이자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리츠의 가장 극적인 전설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완성됐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당시 종군기자로 도시에 입성한 헤밍웨이는 지프를 몰고 곧장 방돔 광장으로 향했다. 그는 함께한 비정규군에게 “리츠의 바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외쳤다.

그가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 고급 장교들은 이미 모두 도망친 후였다. 헤밍웨이는 바의 매니저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뒤, 그날 밤 51병의 샴페인을 터뜨리며 ‘해방’을 자축했다. 리츠의 작은 바가 오늘날까지 ‘헤밍웨이 바’로 불리는 이유다.

프루스트가 영감을 얻고, 샤넬이 숨을 거두었으며, 헤밍웨이가 샴페인을 터뜨린 곳. 2016년, 4년간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다시 태어난 파리 리츠는 호텔을 넘어 ‘파리지앵 시크’라는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를 상징하는 영원한 전설로 남아있다. socool@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연재기획: 원성윤의 호텔의 역사]

①모네의 캔버스, 처칠의 아지트…‘사보이’는 어떻게 전설이 됐나

②110년의 증인, 환구단 맞은편 ‘최초의 럭셔리’ 조선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