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 초연
인간 아닌 말(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평범한 우리의 삶
이달 29일까지 SH아트홀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도전이 때론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을 앗아간다. 스스로 옭아매는 무거운 고삐와 안장을 인간이 아닌 말(馬)의 시선으로 읽어낸다. 창작 뮤지컬 ‘적토_고삐와 안장의 역사(이하 적토)’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선 영웅의 서사로 인간의 삶을 되짚는다.
‘적토’는 극단 ‘죽도록달린다’의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 콤비의 신작이자 제18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으로, 지난 7일 초연으로 관객들을 처음 만났다.
작품은 영웅의 서사에 늘 등장하지만, 관심 밖인 말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적토마(赤兀馬)’의 시선에서 고전 ‘삼국지’ 속 영웅들의 삶이 아닌 삼국시대의 난세를 거쳐 간 수많은 군마의 삶을 조명한다.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는 총 12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토적토’ 역 신은총과 조민호, ‘절영/해설’ 역 최수형과 박민성을 중심으로 오찬우·정민희·서광섭·전우형·김종헌·김동현·지승민·김도연·권강민·류다휘가 번갈아 가며 군마와 장수를 연기한다.

◇ 당신의 인생 목표는 두 ‘적토마’ 중 어느 쪽인가?
정세가 격변하던 후한 말, 마구간에서 정반대의 붉은 털을 가진 망아지 두 마리가 태어난다. 모두 ‘적토마’라는 이름을 가졌다. 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한 마리는 호랑이(赤兀) 눈을 가져 용맹스러운 ‘호적토’라는 이름을 얻는다. 다른 한 마리는 겁먹고 지친 토끼(赤兀)라는 ‘토적토’라고 불린다.
밭을 매던 못 생기고 작은 체구의 ‘토끼 적토마’는 장수 ‘동탁’의 군마(軍馬)로 총애받는 ‘호랑이 적토마’를 부러워한다. 볼품없는 아비의 삶을 따르면서도 언젠간 전장을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던 중 젊은 장수 ‘여포’를 만나 군마로 성장한다. 인생 역전에 성공했지만, 전장 한복판에서 절망의 늪에 빠진다. 이후 ‘조조’의 명마(名馬)인 ‘절영’을 만나고, ‘관우’와 함께 영광과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인생의 끝에 돌아온 곳은 자신이 태어났던 허름한 마구간. 기력이 쇠해진 ‘토적토’는 이곳에서 평생 자신을 옭아맸던 무거운 안장과 고삐를 내려놓는다.
작품은 적토마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보잘 것 없던 토적토가 군마에서 충마(忠馬)가 되고 천마(天馬)로 칭해지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던져진 살인 병기였을 뿐이다.
‘적토’는 인생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꿈을 이루기 위한 직진보단 현 순간 소소한 행복을 잊지 말라고 되뇐다. 무언가에 실망하고 답답함을 느낀다면,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오’가 아닌 ‘용기’라고 말한다.

◇ 영웅 서사의 깊이를 더하는 ‘12명의 장군’
작품은 적토마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열두마리의 말과 다양한 인물들로 하여금 영웅 서사를 구체화한다. 순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장면 전환으로 몰입도에 가속도를 붙여, 커튼콜까지 집중도를 끌어올리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12명의 배우는 시작부터 끝까지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그 역할이 무엇이 됐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작품 전개를 위한 단체 퍼포먼스와 군무는 소극장 공연이라는 점이 아쉬울 만큼 웅장한 장관을 이룬다.
다양한 장르의 역동적인 음악과 빠른 장면 전환으로 긴장도를 높인다. 말발굽이 울리는 땅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전쟁의 긴박한 상황을 표현한다.
배우의 힘을 빌린 수동형 회전 무대는 고달픔을, 수직적인 레이어링의 2층 구조는 인생의 변화와 권력의 이동을 표현하며 극 중 드라마틱한 연출을 구현한다.

‘적토’는 급격히 변화하는 이 시대의 모든 이에게 전하는 응원의 노래다. 서 연출은 최근 스포츠서울을 통해 작품이 주는 교훈을 “누구나 담는 그 순간”이라고 소개했다.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강조한 부분이다.
작품은 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다. 이중 ‘아버지의 삶’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젊은이로 성장하고, 한 가정을 책임지는 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정년을 맞아 은퇴라는 ‘고삐’를 푼다. 하지만 여전히 달릴 힘이 있는데, 그가 설 자리는 없다. 다시 초조해지고 나약한 존재가 된 기분이다.
서 연출은 “달리지만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라는 뜻도 담겨있다.
그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적벽에 비유하며 “‘토적토’는 ‘절영’의 충언을 듣고 다시 일어난다. 의지가 살아난 것”이라며 “‘절영’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그림자였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붉은 말의 해에 ‘적토’가 힘찬 응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서 연출은 “고삐가 풀리고 안장이 벗겨지면 말들은 그제야 알게 된다. 나의 꿈이, 나의 욕심이 구속이었다는 것을. 옭아매는 것들 없이는 질주할 기회도, 자유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며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인생에 지친 모든 이를 어루만지며 응원하는 ‘적토’는 오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SH아트홀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