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7년 만에 첫 연극 도전…새로운 ‘바냐’ 캐릭터 완성
대사를 잊을 것 같은 긴장…무대 오르면 재치 ‘한 국자’ 듬뿍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웃음을 입은 위로와 감동
31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서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배우 이서진(55)이 데뷔 27년 만의 연극에 도전했다. 연기자라는 직업 타이틀로 보면 어색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촬영·편집형 매체와 라이브 공연의 무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다. 이 때문에 ‘베테랑’ 배우에게도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도전’이다. 공연에 앞서 이번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일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막상 막이 오르니 제대로 ‘물 만난 배우’의 모습이다.
이서진은 지난 7일 개막한 연극 ‘바냐 삼촌’에 출연 중이다. 작품은 LG아트센터가 선보인 제작 연극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프로덕션을 통해 다양한 규모와 해석으로 구현된 안톤 체호프의 원작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극 중 이서진은 삶에 대한 회의와 불만을 토해내면서도 끝내 책임과 애정을 놓지 못하는 ‘바냐’를 연기한다.
1999년 드라마 ‘파도 위의 집’으로 데뷔한 이서진은 이후 드라마, 영화, 예능을 넘나들며 대중적 친밀감과 연기적 깊이를 두루 갖춘 배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 자기 이름을 건 예능 프로그램까지 줄줄이 등장할 정도로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가끔 그를 예능인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연극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정통 연기’로 불린다.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배고픈 삶일지라도 대학로 지하 소극장부터 경력을 쌓는 이유 중 하나다. 이서진의 경우 대극장 공연으로 시작은 다르지만, 자기만의 특유의 재치와 진중함으로 흥행 보증수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 100여년 역사의 작품, 금쪽이 삼촌 ‘한국 바냐’로 재탄생
이서진은 지난달 ‘바냐 삼촌’ 프레스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연극이 어색한 장르라서 투정을 부린 것이 아니다. 타인에 의한 긴장감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연 시작되니 생각이 변했다. 그는 13일 라운드 인터뷰를 통해 “어릴 땐 열정을 가지고 일했던 것 같다. 준비 과정에서 최근 10년간 이런 열정을 가지고 했었냐며 새삼 깨달았다”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총 5차례 무대에 올랐다. 전 회차 원 캐스트로 진행된다. 이서진은 “하루하루 버티자는 마음으로 공연에 임한다”라며 “월요일 하루 쉬고 나니 화요일 공연에서 다시 긴장됐다. 마치 학교 다닐 때 개학하는 기분이었다. 대사 생각 안 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했지만, 무대에 올라가니 입이 알아서 떠들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더욱 자유로워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 이서진은 기본적으로 대본에 집중하되 어느 장면들에서는 애드리브로 꾸민다. 145분 동안 관객들이 터지는 웃음을 못 참고 옆 사람과 대화할 정도로 작품의 재미와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손상규 연출은 이서진의 ‘바냐’를 보면서 새로운 ‘바냐’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즉흥 연기라기보다 연습 과정에서 시도했을 때 반응이 좋았던 부분을 더한 것이다. 그도 실시간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심각한데, 여기서 웃는다고? 왜 이렇게 웃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보고 코미디언이냐고도 묻더라. 혹시나 내 연기가 작품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작품을 무겁고 심각하게 안 받아들이니까 오히려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연극에 ‘美친 사람들’과의 동행…스토리의 세계관 확장
이서진이 연극에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손 연출의 역할이 컸다. 첫 미팅에서도, 연습 때도 연극에 대한 손 연출의 열정이 그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 이서진은 “손 연출을 보면서 연극에 미쳐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똘끼’가 있다. 약간 또라이구나 했는데, 그의 모든 삶이 연극이라는 말과 정말 연극에 미쳐있는 모습에 함께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바냐 삼촌’은 고전을 바탕으로 한 다수의 작품과는 차이가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함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극적이지 않게 풀어내, 줄거리를 모르고 관람해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서진 역시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 원작 대신 대본에 충실했다고 한다.
이서진은 작품에 대해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소개하며 “고전이 현대극으로 살아남은 이유다. 개개인의 삶이 있기에 누가 누구를 평가할 수 없다. 이렇게 계속 스토리는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극의 끝에 다다랐을 때 “떠나보내면 끝이다” “예전처럼 다 돌아간다는 것”이라는 대사가 ‘바냐’의 고뇌와 번뇌를 가장 잘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긴 대사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자기의 삶과도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서진은 “특별하게 무엇을 이루겠다는 건 없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좋은 점과 회의감이 동시에 교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고 남은 인생을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삶의 보편적 고통과 기쁨,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엮어낸 ‘바냐 삼촌’은 오는 31일까지 서울 마곡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