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하이저 오르페우스 HE 1
젠하이저가 26년 만에 선보인 최상위 헤드폰 시스템 ‘오르페우스 HE 1’. 이상훈기자 party@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이상훈기자] 명품(Masterpiece)은 다른 제품보다 단순히 품질이 우수하다고 얻을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사용자를 감동시키는 뭔가가 있고, 그 회사만의 철학이 잘 녹아있어야만 한다. 또 선도적인 디자인으로 소비자에게 큰 만족감을 줘야 한다. 이것들이 명품과 고가품(Luxary)을 구별짓는 요소다. 이 코너에서는 세월 앞에 그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는 IT 업계 제품 중에서도 당당히 명품으로 대접받으며 그 가치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제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젠하이저의 집념이 완성한 헤드파이 시스템 ‘HE1’
젠하이저 오르페우스 HE 1
전원을 켜면 수줍은 듯 숨겨왔던 헤드폰과 앰프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훈기자 party@sportsseoul.com

화질에 이어 음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고가의 오디오 시장과 더불어 초소형·고음질 플레이어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음악을 듣지만 그 음질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소비자들의 귀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해 해당 업체들은 하이엔드 오디오에 적용되는 기술과 고급 DAC 칩셋을 사용하며 음질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소비자 귀로 직접 소리를 재생하는 헤드폰의 품질이다.

그 헤드폰 시장도 최근 들어 500만원대 제품이 다수 출시될 만큼 고가격화 됐다. 가격이 높아진 만큼 더 우수한 부품들을 사용했고, 노이즈와 왜곡은 한층 줄어들게 됐다. 고급 헤드폰을 착용하고 헤드폰 앰프의 전원을 넣으면 콘서트장이나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 부럽지 않은 선명한 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그 극상의 해상력과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적은 헤드폰은 음악을 즐기는 오디오파일들에게 꽤 매력적인 음악감상 수단이다.

이 시장에서 톱 그레이드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을 살펴보면 젠하이저, 베이어다이나믹, 포칼, 소니, 오디오테크니카, 울트라손, 포스텍스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다시 최고급 제품을 꼽았을 때 많은 이들이 젠하이저를 언급한다. 아마도 1991년에 선보인 오르페우스(ORPHEUS HE 90/HEV90)의 공이 클 것이다. 이 제품은 헤드폰과 전용 헤드폰 앰프가 결합된 제품이다. 가격도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딱 300대 한정 생산된 제품으로, 젠하이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음향학적 기술이 집약된 제품이다.

하지만 2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젠하이저는 가격을 대폭 낮추고 음질은 크게 향상시킨 여러 제품을 출시하게 됐고 HD800·HD800S 같은 제품들로도 충분히 최상급 음질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젠하이저의 상징과도 같은 오르페우스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이에 젠하이저는 현재의 기술을 집약한 새로운 오르페우스 ‘HE 1’을 새롭게 개발했다. 이 제품은 스펙과 설계 기술 면에서 적수가 없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정전식 헤드폰 최초로 클래스 A MOS-FET 고전압 앰프가 이어컵에 통합 장착돼 있어 앰프 효율을 극대화시켜 준다. 또 가청 주파수 대역보다 넓은 4Hz~100kHz의 초광대역까지 재생할 수 있어 음악이 녹음된 공간의 공기감까지 전달해 준다.

헤드폰에 사용된 드라이버 유닛 속 진동판은 두께 2.4마이크로미터 초박형 백금 기화 진동판이며, 이어패드에는 천연 가죽과 벨루어·초극세사 섬유가 사용돼 착용했을 때 전해지는 촉감까지 부드럽고 시원하다.

전용 헤드폰 내부에는 ESS의 SABRE ES9018 DAC 칩셋을 8개나 사용했다. LG전자의 V20에 사용된 ES9218 칩셋과 조금 다른 칩셋이지만 HE 1에는 DAC가 자그마치 8개나 사용됐다. 여기에 8개의 진공관과 더불어 트랜지스터 앰프까지 결합돼 최저 왜곡율을 달성했다.

젠하이저 오르페우스 HE 1
좌우 측면을 깎아 손웨 쥐었을 때 착 감기는 리모컨의 만듦새도 일품이다. 금속 재질로 꽤 묵직하다. 이상훈기자 party@sportsseoul.com

사실 스펙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언급할 게 많지만 큰 의미가 없다. 타사의 플래그십 헤드폰이 고급 스포츠카라면 젠하이저 HE 1은 F1 레이싱카라 할 정도로 체급과 기술력, 투입된 부품의 물량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가격도 무척 비싸다. 젠하이저코리아에 따르면 실질적인 구입비용은 7000만원이 넘을 전망이다.

제품을 주문해도 금방 받을 수 없다. 전 과정을 독일 본사에서 직접 장인들이 만든다. 앰프의 캐비닛은 대리석을 이어 붙이지 않고 통으로 깎아 만들었는데 보는 순간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전원을 켜면 비밀의 문이 열리듯 숨겨졌던 다이얼이 앞으로 나오고 진공관 8개가 서서히 올라온 다음 은은한 붉은 빛을 내뿜는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되는 양, 서서히 앰프의 형태로 변신하고 나면, 비로소 헤드폰을 담은 상자가 열리며 청음을 권한다.

HE 1을 귀에 꽂았다. 헤드폰이 꽤 큼직하지만 무게배분이 좋아서 무게감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음악을 틀자 귓가의 공기가 바뀌었다. 좌우에서 뮤지션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색소폰과 트럼펫, 바이올린과 드럼이 현란하게 울린다. 젠하이저다운 소리의 디테일이 증폭된다. 여러 악기들이 내는 소리의 경계가, 악기들의 위치가 뚜렷하게 나눠지며 무대를 그려준다.

고음질 음원을 듣다 보면 음악 외의 소리들도 꽤 많이 들린다. 가수들이 숨을 내뱉는 소리나 입술이 여닫히는 소리,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에 앞서 건반에 손이 닿는 소리, 미세한 발자국 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런 소리들이 녹음된 음원을 모두 라이브로 만들어준다. 절대적인 디테일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물론 이런 소리가 때로는 음악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전 제품들에서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들렸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뮤지션이 다가와도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 재미이자 묘미이기도 하지만 음악 외 노이즈까지 선명하게 잡힌다.

일반 CD 수준의 음원을 재생해도 소리의 질이 다르다. 고해상도 음원을 듯는 듯 음이 또렷하고 선명하다. 오래 들어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이 경험을 소유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한국에 방한한 젠하이저의 CEO인 다니엘 젠하이저는 10일, 기자들 앞에서 “HE 1은 세계 최고의 헤드폰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젠하이저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한 최고의 제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HE 1은 극소수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제품이다. 고급 외제차에 맞먹는 가격의 헤드폰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헤드폰이라 부르기에는 미안해진다. 이 제품 하나로 오디오 시스템이 완성된다. 수십 년 동안 가치가 유지되는 제품이다. 소량 생산되기에 소장가치도 높다. 이 제품이 명품이 아니면 무엇이 명품일까 싶다.

party@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