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삼류·여배우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여인
초호화 캐스팅·파워풀 앙상블…이유 있는 흥행궤도
존경·찬사의 눈빛 vs 비아냥·불편한 시선
내년 1월11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가 슬픔에 잠겼다. 당시 열흘 공식 업무가 중단됐다. 모든 가게는 일시에 문을 닫았다. 단 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에바 페론,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된 여인. 지금도 그의 묘비에는 하얀 국화가 놓여있다. 아르헨티나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애틋한 그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전 세계 최연소 영부인이었던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의 생애가 1979년 뮤지컬 ‘에비타’를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을 거쳐 1996년 영화로도 세상과 마주했다. 한국에서는 2006년 처음 관객들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 7일 국내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뮤지컬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생존을 위해 수많은 남자를 유혹한 ‘에비타’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작품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과거가 아닌, 왜 그를 ‘아르헨티나의 성녀’라고 부르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때도 지금도 그에 대한 평판은 ‘천박한 삼류 여배우’와 ‘존경과 찬사를 어머니’로 갈린다. 이를 ‘체(CHE)’라는 내레이터가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신념을 의심한다.
홍승희 연출은 ‘에비타’가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전 세계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작품은 정치나 역사 그 자체보다 ‘꿈을 향한 인간의 열정과 그로 인한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래서 시대가 변해도, 관객들은 여전히 자신을 (에비타)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총 33개 넘버도 거뜬한 실력파 배우들 총출동
14년 만의 무대에 오른 ‘에비타’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들이 이끈다. 19년 전 국내 초연에서 ‘에비타’ 커버 및 ‘후안 페론의 애인’ 역이었던 김소향이 합류, 이번 시즌에서는 온전히 ‘에비타 페론’으로서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와 함께 김소현과 유리아가 천상의 목소리를 선사한다. ‘에비타’를 끊임없이 비아냥대는 ‘체’ 역 마이클 리·한지상·민우혁·김성식, ‘후안 페론’ 역 손준호·윤형렬·김바울 등이 출연한다.
준비 과정부터 진지했다.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 보드를 완성했다. 전 배우는 약 3개월간 진행된 연습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슬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그 결과, 세계적인 뮤지컬 거장 콤비인 팀 라이스(작사)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작곡)의 명곡들로 펼쳐지는 성스루(Sung-through,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 뮤지컬을 폭발적인 에너지로 관객들을 흥분시킨다.
자칫 유치함과 오글거림으로 빠질 수 있는 직설적인 가사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노래로 삼천포로 빠질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고난도의 고음이 섞인 다양한 장르를 여러 발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하며 극의 긴장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한국뮤지컬어워즈 ‘앙상블상’을 노릴 수 있는 에너제틱 퍼포먼스의 배우들이다. 박력 넘치는 현대무용, 유혹의 탱고, 빛의 경고, 죽음의 왈츠 등 댄스크루의 공연을 보는 듯한 역동적 안무가 관객들의 환호를 끌어낸다. 커튼콜 공연 중 ‘체’ 역 김성식의 아크로바틱도 관객들의 회전문을 유도하는 볼거리로 유명하다.

◇ 에바 페론 vs 체, 꿀잼 ‘신경전’…“Don’t cry for me, Argentina”
뮤지컬을 보면 에바 페론이 과연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하는 인물인가 의구심이 든다. 밑바닥 인생에서 남성의 권력을 이용해 가장 높은 곳에 서려는 그의 욕망을 똑바른 시선으로 바라볼 이는 없다. 대통령이 된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 앞에 서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영부인을 존경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국민과 차갑고 싸늘한 반대파의 따가운 시선이 교차한다.
에바 페론은 국고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고, 노동자와 여성들의 손을 잡아줬다. 삼류 취급당해도 경력을 활용해 민중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졌다. 이러한 기록들이 그의 진정성을 대변한다.
다수 역사학자에 따르면 에바 페론이 후안 페론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대선에서 안정적인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결혼을 당했다. 남편의 재선 승리 축하 퍼레이드에서도 자궁암으로 쇠약해진 몸을 억지로 코르셋으로 일으켜 세워 오픈카에 올라 손 흔들었다. 26세 젊은 나이에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은 33세에 불꽃 같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죽어서도 미라로 만들어져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다.
비판의 시선은 ‘체’가 대신한다. 군중심리를 이용해 야망과 욕망을 드러내는 에바 페론을 향해 삿대질한다. 정치하기 위해 악화된 건강을 동정표로 채우려는 야욕을 아니꼬워한다. 가난하고 연약한 계층을 타겟 삼아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라고 비난한다. 권력의 힘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여인이라며 혀를 찬다.
에바 페론이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오)’는 군중심리를 이용한 자신의 바람 속 착각이 아닐까? 그를 가장 힐난하는 ‘체’의 속마음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스페인어 ‘체(Che)’는 문법상 감탄사 외에도 ‘무엇’ ‘그/그것’이라는 뜻도 있지만, ‘친구’라는 의미도 있다. ‘체’는 에바 페론의 안타까운 미래를 예상해서 불운을 막으려는 자인지도 모른다. 해당 넘버는 어쩌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에바 페론의 눈물로도 해석된다.

◇ 화려함 뒤에 가려진 외로웠던 삶을 위로
에바 페론의 화려한 겉모습과는 정반대의 허전한 세트가 무대를 채운다. 그의 흔적이 남을 소파와 군주의 의자마저 뼈대만 있는 철재로 차갑게 자리한다. 그의 마지막 인사도 그의 생애와 같이 흑백 영상으로 남는다.
대신 가장 밝고 아름다운 조명이 에바 페론을 비춘다. 더불어 관객석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테라스는 모든 이의 고개를 위로 치켜세운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숨 죽여 빠져든다. 그의 필름과 달리 흑백 영상 속 군중들은 존경심을 담아 그를 바라본다.
다만, 섬세하고 역동적인 무대를 담기에 협소한 무대 크기와 청력을 잃을 것 같은 찢어지는 음향이 아쉽다.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손 놓고 방기해서는 안 된다. 명작을 구멍가게 학예회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하는 갑질이 일어나면 안 된다.
커튼콜 후 ‘체’의 앵콜 무대가 펼쳐지니 ‘3단 박수법’을 미리 연습해가는 것도 공연을 끝까지 즐길 수 있는 관람 포인트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아르헨티나의 정신적 지주’ 에바 페론의 이야기 ‘에비타’는 내년 1월11일까지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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