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욱
울산 김신욱이 17일 울산서부구장 클럽하우스에서 스포츠서울과 단독인터뷰한 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울산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

우람한 나무에 난 생채기처럼, 삶은 나무에 옹이가 박히듯, 단단히 여물어야 ‘관조의 힘’, ‘지혜의 여백’이 생긴다. 그 기운을 안고 새롭게 거듭난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에 희망을 던진 ‘장신공격수’ 김신욱(울산)도 월드컵의 아픔을 자양분 삼아 축구인생의 새로운 눈을 떴다. 17일 울산서부구장에서 스포츠서울과 만난 그는 “2018 러시아월드컵은 물론 선수로서 목적지를 더 멀리 내다보고 정직하게 달려가고 싶다”며 “서두르지 않고 잔가지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두 달 전 월드컵을 앞두고 만났을 때보다 더 겸손해졌고 확신에 차 있었다.

◇ “월드컵서 보인 희망? 오히려 독 될 수 있다”

“세상이 정말 넓구나. 겸손하게 축구를 해야겠다. 더 노력하면 월드컵에서 골을 넣을 수도 있겠구나”. 김신욱이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은 뒤 떠올린 생각이다. 좌절도 안겨다 줬지만, 희망도 줬다. 알제리전에서 결정적인 헤딩 패스로 손흥민 추격골의 디딤돌을 놓았다. 선발로 나선 벨기에전에서 정상급 수비수와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비록 골은 없었기에 ‘만점 활약’으로 논하긴 이르지만 197㎝ 한국의 장신 공격수도 월드컵에서 통하리라는 기대를 높였다. 정작 본인은 “희망은 독이 될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했다. “유럽의 강한 수비수와 겨루면서 해볼 만하다고 느꼈고 더 큰 무대에서 이들과 경쟁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재미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은 기쁨에도 현실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우려한 게 사실이다. K리그도 절대 쉬운 무대가 아니고 이번 월드컵에서 K리거의 진가를 확인했다. 월드컵에 다녀온 뒤 시야가 넓어진 건 사실이지만 혹여 유럽 진출이나 높은 목표에 대한 갈망으로 주어진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월드컵 전 스스로 연구한 결과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한 김신욱이다. 단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슛 기회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자신과 비슷한 키의 수비수와 헤딩 경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손흥민 이청용 등 측면 공격수와 조화 등을 고심했다. “훈련장이든 생활에서든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생각한 대로 나온 장면이 많았다. 다만 정상급 수비수들은 문전에서 수비하는 게 다르더라. 극복해야 할 벽이다”. 벨기에 백전노장 다니엘 판바이텐은 김신욱이 월드컵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수비수다. 풍부한 경험답게 다양한 유형 공격수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닮고 싶은 선수로는 자신과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닌 마루안 펠라이니(벨기에)를 꼽았다. “공중볼은 물론이고 그 키에 발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와 비슷하지만 유럽에서 검증받은 선수 아닌가”.

[SS포토]김신욱이 뜨면 두 명의 수비수가
[스포츠서울] 27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의 아레나 데 상파울루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예선 한국과 벨기에의 경기에서 김신욱이 헤딩을 하려하자 두 명의 수비수가 함께 떠오르고 있다. 2014. 6. 27. 상파울루(브라질)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 “대표팀 감독 누구냐보다 존중 문화가 우선”

“대한민국에서 스트라이커로 사는 건 정말 힘들구나”. 월드컵 내내 그와 비교된 박주영 얘기가 나오자 한 말이다. 러시아, 알제리전에서 슛 한번 제대로 때리지 못한 박주영은 대회 내내 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 누구보다 홍명보 감독의 축구 색깔에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고 지난해 러시아와 평가전에서 골 맛을 본 김신욱이다. 러시아와 첫 경기 결장은 속상했을 듯하다. 하지만 박주영의 출전은 옳은 길이었다고 강조했다. “선발은 아니더라도 교체 출전을 기대하긴 했다. 그래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박)주영이 형이 몸이 더 좋았고 기존 멤버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췄다.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경기장에서 주영이 형의 움직임, 동료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것, 수비 가담 등 장점을 봤다. 설령 아무것도 못 했더라도 그가 최선을 다했다면 할 건 다 했다. 결과가 나쁘면 비난받는 건 당연하지만 가혹한 면도 있다. 월드컵이 끝나고서도 김신욱 축구에는 이동국 선배의 골 결정력과 주영이 형의 움직임이 결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명보 대표팀 감독은 떠났다. 러시아월드컵을 겨냥해 착실히 대표팀에서 주력 요원으로 뛰어야 하는 김신욱에게도 새 감독의 존재는 중요하다. “국민들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어떤 분이 감독으로 오실지 모르겠지만, 그분을 먼저 존중해주셨으면 한다. 국가대표 감독, 그리고 선수단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와 축구 선수이지 않은가. 홍명보 감독께서 물러났지만 우리 모두 그분이 선수 시절부터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업적을 세운 것을 존중해야 한다. 한 순간의 사안으로 사생활 등 무차별적인 비난이 많은 것 같아 속상하다. 독일 레버쿠젠,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차범근, 박지성 선배들이 팀을 떠난 뒤 어떤 과정을 밟았든 간에 과거의 업적을 존중하고 환영한다. 그게 전통이고 미래의 힘이다. 우리 국가대표 문화도 너도나도 존중이 기본이 된다면 분명 더 좋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SS포토]손흥민 달래는 김신욱, '울지마...'
[스포츠서울] 27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의 아레나 데 상파울루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예선 한국과 벨기에의 경기에서 손흥민(오른쪽)이 벨기에에 패하면 16강 진출이 좌절된 뒤 눈물을 흘리자 김신욱이 달래고 있다. 2014. 6. 27. 상파울루(브라질)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 “올해까지 울산 잔류, AG 금 따면 유럽가고파”

국가대표로서 당면 과제는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이다. 4년 전 대표팀 막내로 출전했을 때보다 책임감이 막중하다. 대표팀 감독 선임이 더디고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아시아 정상 탈환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한국 축구 반전의 기회이고 우승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시안컵은 월드컵보다 우리가 얼마나 잘 준비한다면 성과가 더 나온다고 본다. 새 감독께서 다시 한 번 선수단이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한다”. 이에 앞서 김신욱에게 가장 중요한 건 9월 열리는 인천 아시안게임. 23세 이하 연령대가 겨루는 이번 대회에서 와일드카드로 출전을 노리고 있다. 금메달을 따면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유럽 진출을 노리는 그에게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월드컵 이후 유럽 주요 클럽에서 완전이적이 아닌 임대 제의가 주를 이루는 것도 병역이란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 진출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각에선 여름에 팀을 옮길 가능성을 거론하는데 울산에서 온 힘을 다하고 아시안게임 출전을 노리는 게 유익하다고 본다”.

여름 이적시장 기간에 본인이 원하는 리그와 클럽에서 완전이적 제의가 들어온다면 고민해볼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출전을 허락하는 조건이 있어야만 울산을 떠날 수 있다는 얘기다. “유럽에 무조건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몇 년 전에도 중동에서 거액의 이적 제의가 들어왔는데 월드컵을 위해 포기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울산을 위해 더 뛰고 싶은 욕심도 컸다. 결국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하고 K리그 최우수선수상도 받았다. 돈보다 더 소중한 추억을 쌓았고 월드컵 무대도 밟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신중해지고 싶다”. 자신을 원하고 배울 기회의 땅을 원한단다. 항간에 나돈 러시아 리그 이적설에 대해서도 “주변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많지만 루빈 카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등은 매력있는 구단”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미래를 그리면서도 현실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울산이 최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컨디션을 끌어 올려 후반기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웃었다.
울산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