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조직의 틀을 바꾸는 리더의 판단과 결정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게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발견된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손쉽게 뚝딱 바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하부조직이나 또 다른 공동체를 함께 고려해야하는 책임있는 리더라면 판단과 결정에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자세가 필요하다. 리더의 결정이 조직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며 그 판단과 결정에 따른 변화의 예측과 예기치 않았던 역풍까지 다각도로 고려해보는 통찰력과 혜안은 리더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리더의 판단과 결정은 이렇게 중요하다. 자칫 눈에 보이는 문제 하나를 뜯어 고치자고 내린 결정이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숱하게 지켜봤다.

뜬금없이 현명한 리더에 대해 꼰대 같은 훈수를 둔 이유는 최근 한국프로배구연맹(KOVO)이 주관하는 V리그의 공식 사용구 교체 움직임 소문 때문이다. 프로출범 원년인 지난 2005년부터 V리그 공식 사용구로 사용 중인 스타 스포츠사의 ‘스타(STAR) 볼’은 국내 유일의 국제배구연맹(FIVB) 공인구다.

한국 스타스포츠와 일본의 미카사(MIKASA), 몰텐(MOLTEN) 등이 FIVB에서 공인받은 배구공을 생산하고 있는 가운데 ‘스타 볼’은 V리그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한국 배구산업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 KOVO는 3년마다 갱신되는 공식 사용구 계약에서 ‘미카사(MIKASA) 볼’로 교체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카사 볼’은 배구공의 대명사다. FIVB의 가장 든든한 스폰서 기업으로 올림픽, VNL(발리볼네이션스리그) 등 내로라하는 국제대회에선 모두 ‘미카사 볼’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최고의 품질인 건 모두가 인정하지만 그걸 쓴다고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건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동안 국내 선수들 중 일부는 잇따른 국제대회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볼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국내리그에서 ‘미카사 볼’과 차이가 나는 ‘스타 볼’을 쓰면서 경기감각에서 애로를 겪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지만 이건 냉정하게 따져보면 핑계에 가깝다. 물론 각종 국제대회 경기구로 사용하는 ‘미카사 볼’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스타 볼’이 경기력에 심각한 저하를 야기하는 결정적 흠결이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따져보는 게 우선 필요하다.

‘스타 볼’을 생산하는 스타스포츠는 ‘미카사 볼’을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으로도 만들어내는 그런 회사다.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인데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R&D(연구 개발)와 그에 따른 국제경쟁력을 갖춘 만큼 품질에 관한 문제는 사용빈도에 따른 숙련도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V리그 공식 사용구 교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정부 정책 및 한국 체육의 구조적 문제와도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식 사용구 교체는 스포츠산업 육성에 기치를 든 정부정책과 엇박자를 내는 꼬투리가 될 수도 있다. 체육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십년간 목청껏 소리친 약속이 바로 스포츠의 산업화이기 때문이다.

영세한 스포츠 산업을 정책적 차원에서 키우고 육성하겠다는 방침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서도 예외는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14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열린 ‘2023년 대한민국 체육비전 보고회’에 참석해 “스포츠 산업을 국가성장동력으로 집중 육성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V리그의 사려깊지 못한 조그마한 정책 변화 하나가 한국배구 전체 구도에 더 큰 피해를 불러오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또 다른 문제다. V리그에서 공식 사용구가 교체되면 초·중·고·대학교 및 실업리그에서도 전부 ‘미카사 볼’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 국내 스포츠 산업의 퇴조는 물론 비용 증가에 따른 부담 역시 걱정스런 대목이다.

‘스타 볼’과 ‘미카사 볼’의 가격 차이가 나는 만큼 아마추어 배구의 경제적 부담도 훨씬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현장의 걱정스런 시선이다. 학부모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의 구조상 늘어난 부담은 고스란히 학부모의 호주머니에 의존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오랜 세월동안 영세한 기업이 쌓아올린 노력과 자존심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기껏 공식 사용구 하나 교체하는데 뭘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며 지청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취약하고 영세한 게 바로 한국 스포츠 산업의 냉정한 현실이다.

‘스타 볼’을 생산하는 스타 스포츠도 이 참에 선수들의 볼멘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좀 더 적극적인 품질 개선에 나섰으면 좋겠다. 그동안 스포츠산업 육성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국내 기업의 스폰서십 계약 갱신이 손쉽게 이뤄졌다면 이젠 달라져야 한다. 더 이상 인정과 관행에 의한 계약 갱신은 기업에게도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는 하지만 이게 버릇이 되면 경쟁력을 상실한 3류 기업으로 도태되는 게 시대의 숙명이다.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시장에서 배제되는 건 차별이 아니라 순리다. 그러나 오랜 세월 취약분야에서 자본과 인력을 투자하며 명맥을 유지한 선도기업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별개의 문제다. 그 두가지 대척점의 합리적 경계는 바로 품질이 경기력에 심각한 지장을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스타 볼’이 ‘미카사 볼’에 견줘 경기력을 갉아먹을 정도의 차이가 나는 품질인지 냉정하게 짚어보는 게 가장 현명한 답이 될 수 있다. 만약 ‘미카사 볼’로 바꾸면 한국 배구가 올림픽 메달을 따낼 수 있을 정도로 경기력이 좋아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당장 교체를 해도 무방하다. 아니, 당장 교체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이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공감하는 바다. ‘미카사 볼’은 결코 만병 통치약이 아니다. 무책임한 핑계와 섣부른 결정이 무너뜨릴 ‘공든 탑’이 너무 아쉬워서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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