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가수 겸 연기자 엄정화는 지난 2010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갑상선암은 진행이 느리고 사망률도 크게 높지 않아 ‘거북이암’ ‘착한 암’ 등으로 불리곤 하지만 세상에 ‘착한 병’은 없다. 엄정화 역시 수술 과정에서 성대 한쪽이 마비돼 8개월간 말을 하지 못했다.
‘초대’, ‘하늘만 허락한 사랑’, ‘포이즌’, ‘배반의 장미’, ‘페스티벌’ 등 숱한 히트곡을 발표한 ‘가수’로서 그의 커리어가 끝나는 줄 알았다. 엄정화는 당시의 막막하던 심경을 지난 2020년 방송된 MBC ‘놀면뭐하니’의 ‘환불원정대’ 프로젝트 촬영 당시 고백하기도 했다.
JTBC 토일극 ‘닥터 차정숙’ 종영 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사람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엄정화는 드라마 속 차정숙이 급성 간염으로 수술을 받는 장면에서 자신이 암수술을 받기 위해 올랐던 차가운 수술대가 떠올랐다고 털어놓았다.
“수술실 장면을 촬영하는데 ‘여기 또 올라가네’ 했어요. 물론 연기라서 진짜 수술을 받을 때보다 마음은 편했지만 정숙이가 깨어났을 때 느꼈을 외로움이 와 닿았거든요. 저도 그 때 많이 외로웠어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스트리밍 돼 ‘닥터차’ 신드롬을 일으킨 ‘닥터차정숙’은 의대졸업 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가 간이식 수술로 새 삶을 얻고 늦깎이 레지던트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드라마는 강력한 경쟁작이던 SBS ‘낭만닥터 김사부3’를 제치고 최고 시청률 18.5%(12회, 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하며 안방 왕좌를 차지했다. 넷플릭스가 발표하는 ‘글로벌 톱10’ 비영어권 TV쇼 부문 2위(5월 22~28일 집계기준)에도 오르며 글로벌 인기에도 불을 지폈다.
엄정화는 ‘닥터 차정숙’의 대본을 받은 뒤 주인공 차정숙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연기에 대한 자신의 갈급함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정화가 안방에서 주연을 맡은 것은 2017년 방송된 MBC 드라마 ‘당신은 너무합니다’가 마지막이다. 지난 해 출연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옴니버스 드라마라 분량이 많지 않았다.
“3~4년 정도 슬럼프를 겪었어요. 2020년 개봉한 영화 ‘오케이 마담’은 비교적 성적이 좋았지만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죠. 나이가 주는 부담감 때문에 작품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도 한 몫 했어요. 그런데 20년 동안 주부로 살던 차정숙이 자신을 찾아가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죠.”
정숙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채 오로지 의사 남편인 서인호(김병철 분)와 자식들 뒷바라지로 20년을 보냈다. 하지만 급성간염으로 위독한 상황에 빠진 자신에게 간이식을 망설인 남편을 바라보며 달라지기로 결심한다.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남편의 직장인 구산대학교 병원 레지던트로 합격한다.
공교롭게도 구산대 병원에는 정숙-인호 부부의 대학동기이자 인호의 첫사랑인 최승희(명세빈 분), 정숙의 간이식 수술 집도의였던 로이킴(민우혁 분)이 재직 중이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서, 실수가 잦아서 구박당했던 정숙은 남편과 승희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며 열정적으로 병원 생활에 매진한다. 자신에게 고백하는 로이킴 교수에게는 여자가 아닌 누나처럼 다정하게 대하며 새로운 사랑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정숙은 인호가 아이들의 아빠니까 살았던 것 같아요. 하하. 하지만 정숙이 아닌 자연인 엄정화라면 인호를 멀리하고 로이킴에게 가겠죠? (웃음) 타인이 아닌,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게 ‘닥터 차정숙’의 메시지죠. 이건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경력이 단절된 남성이나, 혹은 막막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요?”
‘닥터 차정숙’만 제2의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엄정화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환불원정대’에 이어 김태호 PD가 연출하는 tvN ‘댄스가수유랑단’에서 현역 댄스가수로서 활동 중인 그는 “얼마 전 고려대학교 축제 무대에 갔는데 학생들이 ‘차정숙’이라고 함성을 질러줬다. 젊은 학생들은 물론,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까지 드라마를 즐겨봤다고 기뻐해주셨다”라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연기자 뿐만 아니라 가수로서 재기도 준비 중이다. 엄정화는 “2년 전 디지털 싱글 ‘호피무늬’를 발표한 뒤부터 계속 신곡을 준비 중이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천천히 준비하고 있는데 후배들이 ‘언니 언제 앨범 내나요?’라고 물을 때마다 기쁘고 의미있다”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2008년 미니앨범 ‘디스코’를 발표한 뒤 8년만인 2016년, 정규 10집 수록곡 ‘드리머’를 발표하면서 이어 마이크를 장만했어요. 그 뒤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것같아 서랍 깊숙이 넣어놨는데 ‘환불원정대’ 활동 때 다시 꺼내게 됐죠. 방송을 마친 뒤 이제 정말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꺼내게 됐네요. 이번 기회에 새로 하나 장만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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