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2021)에서 보여준 연기는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극도의 냉소적인 연기를 펼친 임상수 감독 연출작 ‘하녀’(2010), 노인들을 상대하며 근근이 살아간 ‘죽여주는 여자’(2016), 잠깐의 분량이었지만 치매 노인 연기를 확실하게 보여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이 더 강력한 인상을 안겼다.
오죽하면 박찬욱 감독이 “‘미나리’ 연기는 자다가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윤여정이 한국 미디어 업계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워낙 특별했다. 윤여정 역시도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상을 가정 먼저 구축한 배우다.
윤여정은 “박찬욱 감독이 왜 ‘미나리’로 상을 주냐고 의아해하더라. 자다가도 하는 거 아니냐면서. 엄청난 칭찬이다. 제가 오스카에서 상을 탄 건 참 불가사의 한 일이다. 봉준호 감독이 문을 두드렸고, 여러 가지가 엄청나게 맞아떨어졌다”라고 말했다.
이어 “감사하고 신기하긴 한데, 그뿐이다. 오히려 ‘화녀’(1971)로 청룡영화상 주연상 받았을 때 ‘세상이 내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연기를 정말 잘하는 줄 알았다. 상이 주는 허망함을 알고 있었다. 그저 기쁜 사고일 뿐”이라고 속내를 전했다.
이른바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르고 난 뒤 윤여정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가 물밀듯 밀려온 것이다. ‘미나리’를 통해 받은 것은 조연상인데, 그 인기와 관심을 노린 작품이 너무 많았다는 것에 윤여정은 오히려 씁쓸함을 느꼈다.
“주인공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 시나리오를 보면서 오히려 씁쓸했어요. 난 언제나 여기 쭉 있었는데 갑자기 상 탔다고 주인공 제의가 많이 들어오니까 인간이 참 간사한 거구나 싶더라고요. 난 흥행배우가 아니에요. 오히려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위험한 도전은 하고 싶지 않죠.”
스스로 “책임지는 게 제일 싫다”고 말한 윤여정이 택한 작품은 다음 달 7일 개봉하는 영 ‘도그데이즈’다. 8명의 주요 배우가 출연하는 옴니버스 형태의 작품이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조연출과 배우로 연이 닿은 김덕민 감독의 데뷔를 도와주고자 선택했다.
‘도그데이즈’는 반려견과 얽힌 군상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나 강아지가 느끼는 것이 같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따뜻하면서도 유쾌하고, 훈훈하다. 윤여정은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홀로 반려견 완다를 키우는 민서를 연기했다. 애초 윤여정이 캐릭터 이름일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다.
“김덕민 감독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죠. 둘 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조연출과 배우로 만난 거라 전우애 같은 게 생겼어요.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는구나 싶었어요. 김 감독 인품이 참 훌륭해요.”
영화 속 민서의 에피소드는 생동감이 넘친다. 손자뻘에 해당하는 20대 라이더 진우에게 명언을 담담하게 전하는 장면이나, 잃어버린 완다를 찾아내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포인트에서 잔상이 깊다.
“배우마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 다르겠죠. 걸음걸이도 연구하면서 메소드를 시도하는 배우들도 있을 텐데, 저는 그냥 ‘내가 이 여자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연기해요. 미련할 정도로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외우면서 준비하다 보면 어느덧 그 인물과 가까워져 있어요.”
시대가 변했다. 80년대 건조한 목소리 때문에 시청자로부터 방송 출연 금지 요청을 받은 윤여정은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워너비가 됐다. 솔직하면서도 품위 있는 그녀에게 많은 사람이 호감을 느낀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저는 무례했어요. 솔직함은 무례함을 동반해요. 요즘엔 품위 있게 늙으려고 고민 중이에요. 인생이 참 복잡해요. 제가 웃긴다고 하는데,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웃기라도 하려고 그런 거예요. 페이소스가 묻어난다고도 하는데, 너무 힘들고 더럽게 살아서 그래요. 인생이 그렇죠 뭐. 직장인들 다 더럽고 힘들잖아요. 안 그래요?”
윤여정은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표리부동한 사람을 가장 싫어한 윤여정은 오랫동안 머문 회사도 바꿨다. 작품 수를 줄이고 신의와 시나리오만 보고 작품을 정한지도 꽤 됐다. 올해는 ‘반쯤’이라는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 영험하잖아요. 슬슬 회사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뭔가 터지더라고요. 내 앞에서와 다른 사람 앞에서가 너무 다르면 믿을 수 없잖아요. 조금 더 정직하게 행복하게 살려고요. 올해는 ‘반쯤’이란 독립영화를 무탈하게 찍는 게 목표예요. 작은 영화예요. 저 캐스팅되니까 예산을 키우려고 하더라고요. 그럼 안 한다고 했어요. 저는 흥행배우가 아니거든요. 작지만 좋은 영화로 돌아올게요.” intellybeast@spor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