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인연’이란 개념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동양권에 존재하는 인연이란 단어를 어원부터 종교적 배경 등 다각도로 설명하고, 그 의미를 영화적인 화법으로 풀어냈다. 어렸을 적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던 두 남녀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인연을 맺고, 이틀간 만남을 가지면서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내용이다. “과거에 살고 있다”는 의미의 독특한 제목도 영화를 보고나면 이해된다.
지난해 1월 제39회 선댄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와 시상식에 초청되며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오는 10일(현지시각) 열리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엔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 후보에 올랐다.
영화 만드는 작업을 평생 하고 싶은 셀린 송 감독에겐 데뷔작으로 노미네이트됐다는 것이 기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여성 감독이 데뷔작으로 노미네이트에 오른 건 오스카 역사상 세 번째다.
셀린 송 감독은 “정말 영광이고 좋은 일이다. 선댄스 영화제로 시작해 온갖 영화제를 다 다니며 한 영화로 겪을 수 있는 건 다 겪었다. 1년 동안 배운 게 정말 많다. 잊을 수 없는 수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연이란 단어, 한국 외엔 아무도 몰라”
극 중 나영(그레타 리 분)은 이민을 앞두고 있다. 학교에서 마음을 터놓은 해성(유태오 분)이 마음에 걸렸다. 나영의 엄마는 딸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하고자 해성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음에 두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진다.
12년 뒤, 두사람은 화상으로 만났다. 하지만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1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24년이 지나 드디어 재회했다. 해성은 오랫동안 만난 여자 친구과 헤어졌고, 나영은 미국인 아서(존 마가로 분)와 결혼했다. 아서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재회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여러 감정의 굴레를 거쳐 나영은 아서에게 돌아갔고, 해성은 떠났다.
“한국에서 인연이란 단어는 매일매일 부딪히지만, 한국 외 나라에선 아무도 몰라요. 그렇다고 못 느끼는 단어는 아니에요. 해성과 나영의 관계가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잖아요. 이성 친구도 아니고, 단순히 친구도 아니에요. 아서와 해성의 관계도 복잡해요. 적도 친구도 아니죠. 대답은 결국, 인연일 수밖에 없어요. 엔딩에서 ‘우린 서로에게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에 관객조차도 미스터리한 인연이란 단어를 쓰면서 이야기를 이해하게 돼요.”
영화에서 의외의 포인트는 유태오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유태오는 이방인의 감성이 짙은 배우다. 늘 교포 역을 연기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선 한국에서만 오랫동안 산 토종 한국인으로 나온다. 여전히 그의 한국어는 서툴다. 왜 토종 한국 배우가 아닌 유태오였을까란 질문이 남는다.
“오디션 테이프를 보내준 분이 300명 정도 됐어요. 그 중 최후의 1인이었어요. 해성의 얼굴엔 어른과 어린아이가 공존해야 해요. 모든 역할에 그 모습이 필요하진 않지만, 이 영화에선 중요했어요. 지금 얼굴엔 열두 살 어린이가 없지만, 대화하다 보면 얼핏 그 순수함이 나와야 해요. 유태오는 다 갖고 있었어요.”
◇父 송능한 감독의 인생 자체가 조언
대체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패스트 라이브즈’도 마찬가지다. 다만 과정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로 차별화된다. 단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이 가진 미련을 떠나보내고 한 걸음 성숙해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세 명 모두에게 해피엔딩이에요. 나영이는 해성을 만나기 전까지 ‘열두살 나영’과 이별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선물처럼 예쁘게 이별하는 순간을 만난 거죠. 해성이 역시 후련하고 편안하게 나영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됐어요. 아서는 미련을 돌려보낸 나영과 미래를 그릴 수 있고요.”
셀린 송 감독의 아버지는 영화 ‘넘버3’(1997)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이다. ‘넘버3’는 한석규,송강호 등 국내 톱배우들이 출연한 블랙코미디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예술성이 짙은 인상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상이 영화 내에서도 그려졌다.
“부모님이 영화 관련 일을 하지만, 저는 조언을 듣지 않았어요. 다만 두 분의 인생이 제 성격을 비롯한 모든 것에 담겨 있어요. 현재 부모님은 프리랜서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어요. 부모님의 자유로운 성향과 독립성이 제 안에 담긴 것 같아요. 조언은 없었지만, 두 분의 인생 자체가 조언이자 저인 것 같아요. 덕분에 멋진 영화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