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의 얼굴에 점점 그림자가 짙어진다. 인사팀으로 발령이 났는데, 일이 손에 익기도 전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미가 있는 남자친구는 누군가의 생계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걱정에 괴로워한다. 예비 아내는 그 마음을 모두 읽고 다독인다. 뱃속에 아이가 있어 예민하게 굴 법도 한데, 남자의 마음 먼저 헤아린다.

영화 ‘해야 할 일’은 거제도의 한 조선소에서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인사팀에서 근무한 적 있는 박홍준 감독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다. 특별한 싸움도 짙은 감정도 없지만, 벌어지는 이야기나 인물의 대사와 행동이 사실감이 깊어 쉽게 몰입하게 한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 영화에 싱그러운 공기를 부여하는 건 배우 이노아다. 인사팀으로 발령난 준희(장성범 분)를 안으로 밖으로 살뜰히 챙기는 재희를 연기했다. 솔직하면서 당당하고, 깊게 타인을 이해한다. 남자들이 가장 꿈꾸는 아내상이다. 일종의 남성 판타지를 담았다. 자연인 이노아를 최대한 투영했다.

이노아는 “재희는 저를 넣지 않으면 너무 매력이 없었다. 초고를 봤을 때부터 너무 수동적이었다. 준희가 너무 신경을 안 쓴다. 임신 초기 여자친구고 부부가 되기로 한 사이인데. 준희가 더 매력이 있으려면 재희가 쿨하고 칠린한 매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애드리브가 많았다”고 말했다.

사실상 재희는 영화 내에서 장치적인 역할이다. 배우가 마음에 들어할 포인트가 많진 않다. 분량도 적고, 메인 스토리에서도 벗어나 있다. 잠깐씩 등장해 준희의 힘든 마음을 들여다보는 역할에 그친다.

“초고대로만 갔으면 너무 소비되기만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진솔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사실 고민도 많았어요. 장치적인 역할이라서요. 제가 메인 주인공이면 무조건 하죠. 영화가 완성도 높게 나오는 건 모두의 목표잖아요. 시나리오에 있는 빈틈을 채우는 건 배우들의 몫이라 생각해요. 초고랑 다른 재희를 만들었는데, 감독님께선 흡족해 해주셨어요. 새로운 경험을 한 거죠.”

단편영화 ‘겹겹이 여름’(2022)에선 메인 주인공이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왓챠가 주목한 단편상을 받은 작품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재회하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땍땍거린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짜증을 앞세운다. ‘해야 할 일’의 재희와 정반대에 있는 얼굴이다. 과연 이노아는 어디쯤에서 연애를 할까.

“‘겹겹이 여름’의 연(이노아 분)은 제가 원하는 여성상은 아니에요. 20대 때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30대가 넘어가면 철이 들어야 하잖아요. 저도 나이 먹으면서 남자를 이해하고 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정상인지 아닌지 먼저 파악할 필요도 있고, 사과도 할 줄 알아야 해요. ‘해야할 일’에서 준희의 친구가 준희를 욕하잖아요. ‘왜 이런 애 만나냐’면서요. 거기서 재희가 준희를 마음으로 챙기잖아요. 내 사람을 지켜내는 모습이 참 멋있었어요. 저에게도 그런 힘이 있었으면 하네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