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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장강훈 기자]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남자. 생을 마감하면, 그 순간까지 기억을 고스란히 이식해 다시 프린트되는 남자.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미키17’의 주인공 미키 반스의 ‘프린트된 인생’ 얘기다.
야구기자의 시각에서는 묘한 내적 친밀감이 드는 설정이다. 야구 선수, 특히 타자들의 삶이 비슷해서다. 프린트되는 건 아니지만, 하루에도 두세 번씩 죽는 건 타자들의 일상이다. 다음 경기가 시작되면, 타석을 마감한 당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새로운 투수와 새로운 게임을 한다. ‘미키17’에 흥미를 느낀 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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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과 야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화는 생명의 존엄을 얘기한다. 계급이나 신분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존귀하다’는 것을 다양한 군상을 통해 쉼없이 외친다.
각 캐릭터는 인간 특유의 의외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앞세우는 위정자와 이들에 순응하는 사람, 반기를 드는 사람 등 현재의 삶이 담겨있다. 근(近)미래가 시대배경인데다 기후변화로 지구에서 살기 어렵다는 설정은 공상과학(SF) 영화이지만, 현실감을 더한다. 여러모로 2025년의 ‘지구’와 비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시선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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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용의) 역할에 충실하던 ‘나약한 미키17’이 다소 과격하고 폭력적이고 즉흥적인 미키18과 만나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자아를 찾아간다는 설정은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는 한강 작가의 명언을 연상케 한다.
공벌레처럼 생긴 외계행성 ‘원주민’ 크리퍼 무리가 인간에게 납치·감금된 어린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단체행동에 나서고, 압도적인 성량(?)을 앞세워 인질석방 협상에 성공하는 장면에서는 지난겨울 서울의 작은 섬을 지키기 위해 뛰어나온 시민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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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고 우매한 정치인이자 생명 경시 사상을 가진 ‘3D 생체 프린터’ 주인 케네스 마샬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약소국 대통령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여 힘의 논리를 앞세워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일방적인 거래를 성사하려 한 폭군을 닮았다.
이런 다양한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대규모 폭발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폭 버튼 앞에서 주저하는 미키18을 향해 “네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니, 내게 오면 권력을 나눠줄게”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마샬의 추악한 대사는 봉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를 반어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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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나 ‘옥자’ 등 봉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면, 그가 하고 싶은 얘기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각자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누구도, 어떤 것으로도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가치. ‘미키17’도 봉 감독의 기본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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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영화는 야구와 1도 닮은 구석이 없다. 그런데도 순간순간 야구가 떠올랐다. 수십번 죽음을 경험한 ‘루저’가 자신이 ‘프린트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삶의 의미를 각성(覺醒)하는 순간, 전혀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다. 많게는 매일 서너 번씩 죽어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은 타자가 3할타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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