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글·사진 | 청송(경북)=조선우 기자]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은 아직 산불의 생생한 흔적을 조용히 품고 있다. 능선을 따라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숲을 메우고 있지만, 그 참혹한 틈바구니 사이사이로 연둣빛 새싹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자연은 더딘 걸음이지만 분명하고 묵묵하게 다시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흡사 지옥이라고 불렸던 이번 화마를 기적적으로 피해 간 대전사에는 부처님오신날의 경건한 여운이 아직 남아있다. 앞마당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연등은 산사의 고요함에 은은한 온기를 더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서기 672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돼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전사는 손가락을 하늘로 향해 펼친 듯한 일곱 봉우리 ‘응회암 주상절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암산(巖山)으로 손꼽히는 주왕산의 웅장한 기암절벽과 고즈넉한 고찰이 빚어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장엄한 산수화를 마주한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대전사는 주왕산의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과도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유상협 자연환경해설사는 “중국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퇴한 주왕이 이 산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며 “사람들은 그가 머물렀던 산을 주왕산이라 불렀고, 사찰 역시 주왕의 아들인 대전도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산 곳곳에 남아 있는 주왕굴과 주왕암 등의 지명은 지금도 전설의 흔적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중심 법당인 보광전에 들어서면 자애로운 미소를 띤 석가여래삼존불과 마주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돼 잿더미가 됐으나 현종 13년(1672년)에 중창돼 오늘에 이른 이곳은 전쟁의 화마를 딛고 다시 세워진 상징적인 공간이다. 법당 안에 모셔진 삼존불의 인자한 표정은 또 한 번 화재의 아찔한 위기를 넘긴 산사에 잔잔한 위안을 전한다.


유 해설사는 “대전사에서 불과 약 200m 떨어진 곳까지 거센 불길이 내려와 밤새 마음을 졸였다”며 “다행히 사찰까지 번지지 않아 모두가 안도했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불길이 턱밑까지 다가왔었다는 해설사의 말을 듣고 나니,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고요함을 되찾은 대전사를 뒤로하고 북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오른 거대한 암벽이 시선을 압도한다. 바로 화산활동이 빚어낸 걸작, ‘급수대 주상절리’다. 약 7000만 년 전 펄펄 끓던 화산재(응회암)가 단단히 굳어 형성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빠르게 식고 굳어지는 과정에서 생긴 다각형 균열이 암벽 곳곳에 선명하게 남아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특히 하단에 빼곡히 발달한 절리들은 거대한 암괴에 켜켜이 새겨진 영겁의 시간과 자연의 위대함을 짐작하게 한다.



거대한 암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걷다 고개를 돌리니, 척박한 바위틈에 끈질기게 자리 잡은 둥근 잎사귀가 눈에 들어온다. 주왕산의 깃대종인 ‘둥근잎꿩의비름’이다. 강원도 사투리로 비듬을 뜻하는 ‘비름’은, 꽃이 질 때쯤 하얗게 변해 흩날리는 모습이 비듬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정겨운 이름이다. 또 다른 깃대종인 솔부엉이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발에 난 털이 물건을 닦는 솔을 닮았다는 설과, 몸통의 무늬가 소나무 껍질이나 솔방울을 연상시킨다는 설이 전해져 숲속 탐방의 재미를 더한다. 이름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심코 지나쳤던 바위틈의 작은 들풀과 숲속 생명들이 새삼 특별하게 다가온다. 주왕산의 진정한 매력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뿐만 아니라, 산 곳곳에 억척스럽게 뿌리내린 작은 생명들까지 닿아 있다.





자연이 만든 조각품들을 지나면 마침내 용추협곡이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협곡의 웅장한 문처럼 솟은 거대한 바위 사이로는 맑고 찬 용추폭포가 시원하게 이어진다. 속세와 천상을 가르는 경계라 불린 이곳은 예로부터 청학동으로 통하며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던 명소다. 장엄한 풍경을 넋 놓고 감상하다 보면 마치 신선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경쾌한 물소리를 노랫소리 삼아 탐방로를 계속 걷다 보면 절구 폭포와 마주한다. 기하학적인 바위를 따라 흘러내린 물줄기는 맑은 선녀탕을 이루며 깊은 산중의 운치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어 탐방로 끝자락에서 만나는 용연폭포는 주왕산을 대표하는 최고의 비경 가운데 하나다. 장쾌한 2단 물줄기가 깎아지른 암벽을 타고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폭포 아래로는 하얀 물보라가 쉴 새 없이 피어오른다. 용이 머물다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이 웅장한 공간은 주왕산의 깊고 그윽한 산세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오래도록 탐방객의 발길을 붙든다.


끔찍했던 화마가 스쳐 간 계절을 뒤로하고, 답답한 회색 도심을 벗어나 찾은 주왕산에는 여전히 웅장한 바위와 싱그러운 숲이 굳건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처럼 기적 같은 풍경 뒤에는 묵묵히 구슬땀을 흘린 국립공원공단의 꾸준한 복구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공단 직원들은 생태계 회복을 위해 무려 20kg에 달하는 무거운 물통을 메고 가파른 능선을 오르내리며 밤낮없이 현장을 지켰다. 위대한 자연은 인간의 헌신적인 노력에 화답하듯, 검은 상처를 딛고 다시금 푸르고 찬란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상처를 치유하고 새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주왕산 곳곳은 다시 찾아 줄 탐방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blessoo@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