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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술은 많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이다. 적정량의 음주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술에 취한다는 말에서 취할 취(醉)자는 술 유(酉)자와 마칠 졸(卒)자로 구성되어 있다. 술(술병)과 마침의 뜻을 내포한 ‘술 취할 취醉’는 놓여있는 술을 다 마셔 취한 상태를 말한다.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애주가를 뽑는다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 바로 세조를 꼽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술자리(置酒, 設酌 등)를 검색하면 973건이 나온다. 이 중에서 13년 3개월 재위한 세조대에 467건이다. 세조가 신하들과 얼마나 빈번하게 술자리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 ‘너’ ‘태상’이라 부르다 - 3개월 유배형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취중 실수의 대표적 인물이 정인지(1396~1478)다. 애주가인 그는 술만 마시면 사고를 칠 정도로 주사가 심했다. 1458년(세조 4년) 9월 15일, 세조는 경회루에서 환갑이 넘은 대소 신료들을 불러놓고,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때 술에 취한 정인지는 세조를 보고 ‘너’라고 부른 것이다. 다음날 의정부에서 정인지의 불경함을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세조는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이라며 논하지 말라고 했다.
9월 17일 의정부와 육조에서 다시 정인지의 죄를 청하자, 세조는 “그날 정인지가 나에게 너라고 칭하며(麟趾與予稱爾汝曰) 말하기를, ‘나(정인지)는 네(세조)가 한 말을 모두 듣지 않겠다(若之所爲 皆吾不取)’고 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술이 몹시 취하였다 하더라도…정인지가 한 말은 너무 방자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공이 있는 신하이기 때문에 죄를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의정부와 육조 등에서 “정인지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단종 복위 사건 때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한 성삼문과 다를 바 없는 역신의 막말”이라며 정인지의 죄를 계속 청하자. 세조는 “정인지가 취중에 한 말은 모두 옛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며 더이상 거론하지 않토록 하였다.
이듬해인 1459년 (세조 5) 8월 1일, 연회자리에서 정인지는 술에 취해 세조를 태상(太上)이라 불렀다가 분노를 사기도 했다. 태상은 왕위를 물려주고 생존해 있는 전대(前代)의 임금이란 뜻이다. 지금의 임금이 아니라고 했으니 작은 일이 아니었다. 세조는 또 용서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정인지의 무례함을 탄핵하니, 결국 정인지를 파직하고 3개월간 부여로 유배 보내는 걸로 마무리하였다.
◇“진실로 마땅합니다” - 6개월 유배형
세조의 이러한 주석(酒席:술자리)정치는 취한 가운데 쏟아내는 속마음을 들으려는 왕의 의도에 따라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됐다. 1462년(세조 8년) 5월 8일 세조는 신하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세자의 학문을 논하면서 “세자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뒤에 왕위를 넘겨주고자 한다”고 하자, 술에 취한 정창손(1402~1487)은 “진실로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문제였다.
5월 9일 세조는 도승지에게 “조정의 여론이 나를 족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정창손의 대답이 그러한 것이다”고 하자. 도승지는 “어제 정창손은 본시 마시지 않았고, 말도 구차하지 않았는데, 어제 그렇게 대답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의금부에서 신문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들도 정창손이 공신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자. 세조는 “정창손의 말한 바는 말 실수이나, 난신 적자가 오히려 잇달아 계속하여 일어날 만하니, 이것이 정창손의 큰 잘못이다”라며, 정창손을 파직시키고 6개월 간 유배형에 처하였다.
◇퇴위를 권유하다 - 참수형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도운 양정(?~1466년)은 수양대군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종서 일가를 숙청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466년(세조 12년) 6월8일 양정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오랜 북방 근무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왔고 이에 세조는 연회를 베풀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했다. 술이 두어 순배에 이르렀을 때 양정이 갑자기 세조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양정은 술기운을 빌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제 왕 위에서 물러나 편안 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한 것이다. 왕의 퇴위를 언급하니 분위기 정말 갑분싸! 세조가 재차삼차 “나보고 물러나라는 거냐”고 물었지만 양정은 “신의 마음도, 민심도 그렇다”고 했다. 세조가 다시 “내가 죽고, 경(양정)도 죽는다면 나랏일은 누가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양정은 “차례차례로 있게 될 것입니다”라며 꼬박꼬박 대답했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양정은 정직한 신하인 까닭으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의 자리에 오래 있겠는가?”하면서, “상서원(어보 담당관청)에서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는 양위소동을 벌이자 대소 신료가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자 양정은 “어째서 옥새를 가져오지 않는가?” 하면서 재촉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다.
대신들이 계속적으로 양정의 죄를 벌할 것을 청하자 세조는 “내가 혼자 거처할 때라면 헛된 말로 인정하겠지만, 여러 신하들이 들었으니 사사로운 것으로 용납할 수 없다” 하여, 결국 양정은 세조에게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죄로 6월 12일 도성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 너그러웠던 세조지만 왕의 자리까지 언급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역사 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