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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통곡소리를 들었을 창경궁 회화나무. 출처|연합뉴스

◇노론의 전성시대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가두었다.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한 여름 뒤주 속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당파싸움에 희생된 억울한 죽음이었다. 당시 뒤주를 지키던 포도대장 구선복(1718~1786)과 그의 수졸들은 사도세자를 조롱하고 있었다. “떡을 먹고 싶으냐 떡을 줄까. 술을 마시고 싶으냐 술을 줄까.”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기척이 없었다. 보고를 받은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루 더 두어라”라고 명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을 임오년에 일어난 큰 변고란 뜻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한다.

훗날, 정조는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1722~1776)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정조가 남긴 ‘존현각일기’에는 영조 말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정조와 신하들간의 갈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을 만날 때에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 끄는 소리를 탁탁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었다. 신하들은 세손(정조)을 그들 손안의 물건 쯤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위협했다.

1775년(영조 51) 11월 20일,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다. 그러자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알 필요가 없으며, 병조판서와 이조판서의 일 또한 알 필요가 없다. 나아가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11월 30일, 노환이 깊어진 영조가 신하들 앞에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을 때, 실록에는 “이때 홍인환이 승지의 앞을 가로 막고 앉아서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하였다”고 돼있다. 더구나 이자리에는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도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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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손서.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정조의 부적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었다. 닷새 만인 3월 10일 온갖 위협과 설움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세손이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당일 정조는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임(寡人.思悼世子之子也)을 천명했다.

이미 긴 세월 동안 다져진 노론 세력은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이른바 ‘8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며, 왕위계승의 정당성까지 거론하며, 세손(정조) 제거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자신을 모함하는 정적들의 공격을 견뎌내야 했던 정조. 그런 그에게 평생 동안 곁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있던 부적이 있다.

1776년 2월, 정조가 25세 되던 해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행과 관련된 승정원의 기록을 지워달라는 상소에 영조는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도장과 편지로 답을 하였다. 바로 ‘효손은인’과 ‘유세손서’이다.

영조가 쓴 ‘유세손서’는 ‘83살의 할아버지가 25살의 손자에게 의지한다’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로 두루마리 족자로 되어 있고, 어보인 유서지보 인장이 9개나 찍혀 있다. 큰 글씨로 ‘효손’, 작은 글씨로 ‘팔십삼서’라고 새겨진 글씨는 조선시대 어보 중 왕의 친필로 새겨진 유일한 어보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도장과 편지를 받은 정조는 14년 이란 긴 세월의 고통에서 벗어나 대역적 죄인의 아들(사도세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경계했던 신하들에게 ‘조선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로 조회나 거둥 때면 늘 은인과 ‘유세손서’를 앞세웠다고 한다.

<역사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