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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강원도 춘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어느 시골마을, 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 5대. 분교였던 모교의 동급생은 단 2명뿐이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라 같이 놀 친구조차 없던 소년의 친구는 안방 TV가 유일했다. TV속 도시는 밤이 돼도 낮처럼 밝고 화려했다. 마치 명절 도시 친척집을 갔을 때 느꼈던 설렘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웠다.
유달리 TV를 좋아했던 소년은 박신양·김남주 주연 SBS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에 마음을 뺏겼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TV속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밉지 않은 오지라퍼 소경필 역으로 눈도장을 받은 배우 문태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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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멘붕’ 빠뜨린 수영과 하룻밤 “욕 먹었지만 소기의 목적 달성”
드라마가 종영한지 열흘이 지났지만 여전히 작품에 과몰입한 팬들은 ‘사랑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인공들의 서사를 곱씹고 있다. 일부 팬들은 드라마에서 잠깐 등장한 소경필과 박미경(금새록 분)의 전사(前史)를 스핀오프로 제작해달라는 목소리를 낼 정도다. 은행에서, 혹은 직장에서, 진짜 내 옆에 있을 법한 오지라퍼.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속은 내비치지 않는 사내. 배우 문태유는 소경필 역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표현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소경필은 그간 연기한 캐릭터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려운 역할이었다. 시작은 오지라퍼지만 후반부에는 반전을 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재밌고 편안하지만, 긴장을 조성해야 했다. 그래서 오히려 초반부 촬영이 더 어려웠다. 경필이 나오는 신에서는 숨통이 트이지만 그의 가벼움을 어디까지 묘사해야 할지 고민했다.”
문태유의 고민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수영(문가영 분)이 상수(유연석 분)와 헤어지기 위해 경필과 하룻밤을 보냈다고 고백하는 12회 엔딩은 드라마 시청자들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문태유는 “시청자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지만 수영과 경필의 관계에 궁금증을 갖게 했다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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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유의 절제된 연기는 결과적으로 소경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시청자들에게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남녀관계에서 가장 무서운 건 연민”이라는 경필의 대사가 나온 9회 주차장 신부터 그는 기존의 여유 있는 표정을 버리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랜 연기경험에 비추어 감정을 계산하며 연기했던 문태유도 떠나는 미경에게 오랜 짝사랑을 고백해야 했던 15회를 촬영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문태유는 “첫사랑이자 평범하지 않게 헤어진 여자가 내 절친과 교제했다. 그 절친은 다른 여자와 마음 정리가 안됐고, 이렇게 얽히고설킨 고약한 사랑은 현실에서 해본 적이 없다”며 웃었다. 그조차 연기를 하며 극에 과몰입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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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물 계량컵에 재서 끓였던 20대…이제 행복한 40대 맞고파
문태유가 연기자의 길을 꿈꾸게 된 건 고교 시절이다. 인근에 거주하던 고모가 극단 가입을 권한 게 결정적이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힙합에 빠져 고교 힙합팁으로 활동했다. 자연스럽게 가수의 꿈을 갖게 됐지만 실용음악과에 가려면 학원비가 비쌌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춘천이 주무대인 극단에서 젊은 배우를 뽑는다는 내용이 지역 신문에 보도됐다. 젊은 배우가 부족한 지역극단들은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서울소재 연극영화학과에 진학까지 시키는 역할을 하곤 했다. 신문을 읽은 고모의 권유로 극단에 입단하게 됐다.”
극단 활동을 하자 자연스럽게 지역신문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언론보도를 통해 경력을 인정받으며 경희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수시입학했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고달팠다. 한정식집 설거지, PC방 아르바이트, 영화관 티켓 검표, 카페 서빙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모 대기업이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기간 사원들의 연극제작을 돕는 아르바이트까지 경험했다.
주식은 라면이었다. 문태유는 “사회초년병 시절, 하루 한 끼 라면만 먹다보니 그 한끼가 무척 소중했다. 절대 망칠 수 없어 라면물을 계량컵에 맞춰 끓이곤 했는데 그게 버릇이 돼 지금까지 라면을 끓일 때는 계량컵에 물을 재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풍족해본 적이 없다. 극 중 지방에서 올라온 종현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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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뮤지컬 ‘드라큘라’에 캐스팅되며 비로소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2017년, 지금의 소속사와 전속계약하며 본명 이승원에서 활동명을 문태유로 바꿨다. 그는 “앞으로 나 자신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 스스로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문태유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2021년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경외과 펠로우 용석민 역으로 캐스팅됐을 때를 꼽았다. 그는 “94세인 할머니가 경증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데 내가 나온 드라마를 보신 뒤 ‘승원이가 연기를 아주 잘 하네’라고 칭찬하셨다. 대단한 장면은 아니지만 무척 뿌듯하고 기뻤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어려운 20~30대를 보냈기에 문태유는 누구보다 행복한 40대를 꿈꾼다. 그는 “20~30대를 성공에 대한 욕심과 불안에 차 보내다 보니 행복을 쉽게 느끼지 못하곤 한다”며 “앞으로 행복을 느끼는 연기자가 됐으면 한다. 무대에서는 어두운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저의 또다른 모습과 매력도 보여드리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mulgae@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