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베를린 올림픽 이후 손기정 선생님은 모든 걸 잃은 사람이었죠. 국민적 영웅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뒤 다시 희망을 찾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의의 아닐까요.”

벌써 4년 전 촬영한 영화지만 지금 배우 하정우에게 영화 ‘1947보스톤’의 손기정 역할은 의미가 남다르다. 그 역시 앞서 개봉한 영화 ‘비공식작전’의 뼈아픈 실패를 맛봤기 때문이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지금 한국영화계가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묘사하는 듯 했다. 숱한 영화인들이 “남 얘기가 아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하정우가 아니다. 자신이 택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해 완주하는 그의 모습에서 서윤복이라는 탁월한 재목을 길러낸 손기정의 모습이 엿보였다.

영화 ‘1947 보스톤’은 평소 하정우가 존경하던 강제규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오랜 버킷리스트를 이룬 작품이다. 강제규 감독은 하정우의 중앙대학교 선배기도 하다.

“군 복무 중 엄청난 블록버스터물이 나왔다는 소문이 부대에 자자했어요. 그게 ‘쉬리’(1999)였죠. 그때만 해도 부대 내에서 영화를 볼 수가 없어서 휴가 나와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봤어요.(웃음)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죠. 한국에도 이런 블록버스터물이 나올 수 있다니. 감독님은 제게 레전드가 됐어요. 무슨 단편을 촬영한다 소문이 나면 저도 빨리 그 판에 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죠.”

영화 ‘신과 함께’(2017)시리즈의 김용화 감독이 사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강감독을 만났지만 공적으로 만난 건 2018년 ‘1947보스톤’의 시나리오를 받은 뒤였다. 하정우는 당시 기분을 “어릴때부터 가졌던 꿈을 이룬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전 국민이 다 아는 국민적 영웅을 연기해내야 하는 건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은 연기베테랑 하정우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손기정이 평안북도 의주부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저희 할아버지가 이북 출신이셨거든요. 할아버지를 닮은 큰아버지가 굉장히 다혈질이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인데 그런 모습이 손기정 선생님을 표현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됐어요.”

제자 서윤복 역의 임시완에 대해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동물 같지만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정우는 “투수로 치면 직구의 힘이 강하다. 물리적인 노력을 통해 서윤복의 눈빛을 만들어내고 철저한 식단관리를 통해 촬영에 임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며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덤비는, 멋진 배우”라고 말했다.

실상 하정우 자신도 기본에 충실한 배우다. 그는 시나리오를 받은 뒤 감독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대본을 완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비공식작전’에 함께 출연한 배우 주지훈은 그런 하정우의 모습에 자극 받아 SBS 드라마 ‘하이에나’(2020) 대본을 완독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본기를 다지는 건 배우로서 당연한 노력입니다. 흡사 야구선수가 스프링캠프에서 몸을 만들 듯 저도 작품에 들어가기 전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감독님과 논의하는, 저만의 스프링캠프 과정을 거치죠. 선수들이 스프링캠프에서 기본기를 다지면 경기에서 승리하지만 영화는 다음 작품까지 그 노력이 이어지지 않아요. 다만 사람과, 경력이 남게 되죠.”

그는 ‘비공식작전’의 실패를 ‘오답노트’라고 정의하며 차기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영화 ‘야행’과 ‘하이재킹’ 촬영을 마쳤고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 ‘로비’ 촬영도 한창이다.

하정우는 “엔데믹 이후 어떤 작품이 게임 체인저가 될지 모르겠다”며 “가성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MZ세대의 특성상 요약본, 2배속 보기가 유행하지만 그런 경향이 주류로 정착할 것 같지는 않다. 트렌드는 돌고 돌지 않나”라고 자신했다.

프로야구 LG트윈스의 오랜 팬으로 잘알려진 하정우는 인터뷰 내내 모든 연기 활동을 야구로 비유했다.그는 “지난해 LG트윈스 성적이 아쉬웠는데 올해는 잘하고 있다. 만약 한국시리즈 시구 요청이 오면 나가겠다”고 했다.

“지난해 성적은 올해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한 밑거름이었죠.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황해’(2010)나 ‘군도’(2014)도 예상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작품성으로 호평받았죠. 저도 지금의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연기로 롱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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