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8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공연

지구 최초 우주 탐사견 ‘라이카’vs어른 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차라리 진실을 모르는 게 나은 상황도 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내면에 감춰진 배신을 감당해야 하는 버거움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희생만 따르는 미움만이 최고의 복수는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다른 이해, 즉 지혜와 용서를 알아간다. 뮤지컬 ‘라이카’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소중함과 사랑의 힘을 풀이한다.

‘라이카’는 지구 최초 우주 탐사견 ‘라이카’와 어른이 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인간을 향한 미움과 증오를 사랑으로 승화해 지구를 지켜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에 홀로 탄 ‘라이카’가 인간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주로 떠난다. 앞발을 들어 인간들에게 인사하는 ‘라이카’를 향해 “우리의 영웅, 세계의 미래, 인간의 희망, 위대한 존재”라며 손 흔든다. 광활한 우주를 떠돌던 ‘라이카’는 ‘왕자’의 도움으로 소행성 B612에 착륙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반가움도 잠시, 인간을 혐하는 ‘왕자’의 ‘지구 멸망 작전’에 투입된다.

고민에 빠진 ‘라이카’. ‘왕자’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라이카’는 떠돌이 개였던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준 인간 ‘캐롤라인’과의 재회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에게 “기다려”라고 말했던 ‘캐로라인’의 음성을 기억하며 지구로 돌아갈 날을 고대한다.

하지만 이 기다림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한 로케보트에게서 듣는다. 믿었던 인간을 향한 실망과 배신감에 분노가 끓어오르지만, 이를 부정하려고 발버둥 친다.

‘왕자’가 말한다. 인간은 희생양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가설, 구설, 소설을 좋아하는 인간이 만든 허구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인간이 잘해주는 이유는 배려가 아닌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반복 강조한다.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비밀만 쌓는 인간에게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며 ‘라이카’를 설득한다.

이때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하는 ‘장미’가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건넨다. 상처의 기억에 머무르지 말고, 건강한 뿌리(생각)를 키워 눈물로 감추면서 사랑하라고 조언한다. 그 악몽 속에도 행복했던 순간은 있었으니까.

◇ 광활한 우주의 외침 “기다려... 기다리지마, 아니 기다려”

실제 ‘라이카’가 탄 스푸트니크 2호에는 4일 치 사료만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라이카’의 음식에는 안락사를 위한 독약이 타 있었다고. 당시 ‘라이카’의 나이는 고작 37개월이었다. ‘라이카’는 우주선 발사 약 7시간 후 영원히 잠들었다고 알려졌다.

인간의 말은 하지 못하지만, 인간과 같이 공감한다. 자신을 가족처럼 돌본 ‘캐롤라인’으로 인해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 ‘라이카’는 끝없는 우주를 떠돌면서 ‘장미’의 말처럼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작품 속 ‘라이카’가 ‘캐롤라인’을 만나기 위해 지구로 돌아온 2008년 모스크바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정치적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의 구실은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한정석 작가는 이에 대해 “인간의 이런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싶었다. ‘라이카’는 영웅 취급을 받지만, 현실의 ‘떠돌이 개’들은 여전히 좋은 처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왕자’는 인간을 하찮은 존재, 더러운 먼지와 오물에 비유한다. 전쟁, 성적 학대, 살인, 파괴, 악플, 마녀사냥 등 전 세계적 사회문제를 지적한다. ‘라이카’의 동상처럼 잠시 ‘존재’를 기억할 뿐, 점점 생명체를 잊고 살다가 가끔 회고되는 모순을 꼬집는다.

◇ 우주의 별이 된 ‘존재’, 사랑과 위로의 속삭임

뮤지컬 ‘라이카’는 인간의 부정적인 단면만 보여주지 않는다. 우린 작품을 통해 ‘친구(동반자)’와 ‘치유’의 의미를 배운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밝고 활기찬, 누구나 상상해본 동화 속 꿈의 행성을 보여준다. ‘장미’와 ‘바오밥’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라이카’의 새로운 삶을 응원한다. ‘왕자’도 그가 가장 그리워하는 ‘캐롤라인’을 로케보트로 제작해, ‘라이카’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돌본다.

‘왕자’ 역시 인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생텍쥐페리를 향한 그리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의 코트에 묻은 먼지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지워지지 않은 채 순수한 색색의 물감들로 가슴 깊숙이 새겨져 있다.

자신을 아름답다고 세뇌하는 ‘장미’를 통해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야만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정한, 정해진 운명이 아닌 인생은 스스로 정하는 것. 로케보트 ‘캐롤라인’은 때론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할 수 있지만, 잠시 상처받더라도 진실을 알려주는 것도 ‘친구’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라이카’와 ‘왕자’는 흰 상자 하나를 ‘양’이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라이카’와 ‘캐롤라인’, ‘왕자’와 ‘생텍쥐페리’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기억이다. 그래서 단순히 애장품이 아닌 서로를 헤아리며(量) 따뜻했던 추억(陽)을 안고, 훗날 다시 만나자는(暘) 의미를 전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 포옹해주듯, 사랑과 위로를 속삭이는 ‘라이카’는 오는 5월18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상큼, 발랄한 ‘라이카’를 완벽하게 인간화 한 박진주·김환희·나하나,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코트에 물감 묻히고 다니는 어른이 ‘왕자’ 역 조형균·윤나무·김성식, 사랑의 깊이를 알려주는 아름다운 ‘장미’ 역 서동진·진태화, 여전히 ‘라이카’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을 꿈꾸는 ‘캐롤라인’ 역 한보라·백은혜가 공연장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