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잠실=원성윤 기자] 롯데 황성빈(28)은 올시즌 KBO리그를 달구는 핫가이다. 출루만 하면 상대 투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KIA 투수 양현종을 상대로 도루를 하려는 제스처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로 온라인을 달궜다.
18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전에서도 선발투수 케이시 켈리가 자극받았다. 이에 양측 팀에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즌 1호 벤치 클리어링이 터졌다.
켈리가 지적한 건 황성빈 주루였다.
3회 타석에 들어선 황성빈은 1볼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좌측 선상으로 타구를 날린 뒤 1루로 전력 질주했다. 통상 선수들이 파울타구에 가다가 멈추는 것과 달리 발이 빠른 황성빈은 어느새 1루를 지나가 있었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황성빈이 다시 타석으로 돌아오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피치클락 위반 경고까지 따라왔다. 켈리 입장에선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매너가 없다고 인식했을 수 있다.
7구 승부 끝에 컷 패스트볼을 감아쳐 기어이 우전안타를 뽑아냈다. 커트로 파울만 4개를 만들었다. 켈리는 이런 황성빈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결국 1루 견제를 하다 송구 실책이 나왔다. 타이밍상 아웃이었으나, 볼이 빠지는 바람에 2루까지 내달렸다. 황성빈이 혀까지 내밀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켈리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결국 3회초가 끝난 뒤 황성빈을 향해 거칠게 분노를 쏟아냈다. 당황한 황성빈도 맞섰다.
그러면서 양측 벤치에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와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롯데 주장 전준우는 황성빈을 감쌌다. LG에선 베테랑 포수 허도환이 분노를 참지 못했다. 여러 선수가 뜯어말릴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앞선 상황을 봐야한다.
켈리는 1회초 황성빈에게 9구까지 가는 풀카운트 승부 끝에 우전안타를 허용했다. 도루도 헌납했다. 이어진 레이예스 타석에선 내야안타에 2루에서 홈까지 들어와 득점을 했다.
2루수 신민재가 황성빈을 잡기 위해 3루로 공을 보냈다. 늦었다. 이미 황성빈은 3루를 돌아 홈으로 향하고 있었다. 3루수가 공을 포수 박동원에게 전달됐으나 세이프였다. 발이 빠른 황성빈을 3루에서 잡기 어려웠는데, 굳이 3루로 공을 보낸 게 아쉬웠다.
고영민 주루코치가 멈추라고 지시한 것 같았으나, 황성빈은 “고영민 코치님 사인을 보고 뛰었다. 2루수가 잡은 것도 못 봤다. 코치님이 만들어준 득점”이라고 말했다.
켈리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가 던진 전체 투구수 107구 가운데 17.7%인 19구를 황성빈에게 뿌렸다. 투구수를 야무지게 뽑아냈다. 주루로 내야를 뒤흔들었다. KBO리그에서 여섯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그가 일찍이 접해본 적 없는 유형의 선수였다. 1회 2실점하며 흔들렸다. 상대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3회에 비슷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자 감정이 폭발했다.
롯데는 절실했다. 8연패를 끊어야했다. 황성빈도 간절했다. 대주자로만 나오다 선발로 나선 건을 이번 시즌 2번째였다. 언제올지 모르는 선발출장 기회였다. 타율은 0.083에 머물렀다.
이날 5타수 2안타 1도루 3출루로 활약했다. 타율도 0.176까지 올랐다. 2안타도 1도루도 모두 켈리를 상대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경기 수훈 선수는 단연 황성빈이었다.
황성빈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누구도 백업으로 뛰려는 선수는 없다. 다 선발로 뛰고 싶어 한다. 나는 올 시즌 백업으로 스타트했다”며 “김주찬 코치님, 임훈 코치님이 언제든지 게임에 나갈 수 있으니까 절대 방망이를 놓지 말라고 하셨다”고 밝혔다.
빠른 발 덕분에 경기에 간간히 나오기는 했으나 배트를 잡고 타석에 설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한화 선발 문동주가 등판한 지난 4일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다시 온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타석에 설지 모를 일이었다.
김태형 감독 스타일이 그렇다. 잘하는 선수에겐 기회를 계속해서 주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나오면 가차 없이 2군으로 보낸다. KBO리그 최초로 한국시리즈 7회 연속 진출의 대역사를 쓴 두산 화수분 야구의 시작도 선수간 경쟁을 붙이면서 시작됐다.
황성빈도 백업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더구나 테이블세터인 2번 타자로 나섰다. ‘윤동희-김민석’ 궁합이 맞지 않다는 김 감독 판단에서다. 이날 ‘윤동희-황성빈’ 테이블세터 조합에서 5안타 3득점 2타점이 쏟아졌다. 이 조합을 계속 볼 가능성이 높단 뜻이다.
김주찬 타격코치와 임훈 코치는 직전 사직 홈 경기가 끝난 뒤에 황성빈을 불러 배팅 훈련을 시켰다. 황성빈은 “두 분이 훈련을 도와주신 덕분에 오늘 2안타를 기록할 수 있었다”며 “첫 선발출전에서 타석에서 어땠는지 돌아보고 잘 준비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켈리와의 상황에 대해선 “얘기 안 하면 안 되겠냐”며 즉답을 피했다. 다만 주루플레이로 불편해 하는 투수와 상대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답했다.
황성빈은 “누가 나를 봐도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그 이미지가 상대팀에서는 불편하다고 내가 준비한 것을 안 할 수는 없다.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황성빈은 “내가 상대팀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이게 할 수 있는 이미지이니까 나는 그걸 이용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플레이 스타일에 호오(好惡)가 갈리는 건 분명하다. 세레머니도 확실히 튄다. 악동같다. 그러나 프로는 결과로 말할 뿐이다. 매너는 분명 필요하지만, 투수가 거기에 자극 받아선 안 된다. 켈리의 감정은 긁혔고, 황성빈 활약에 흐름은 롯데로 넘어왔다. 차분하게 넘어갔더라면 LG는 이후 또 다른 기회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7회 6점을 뽑아내는 롯데 빅이닝의 출발도 황성빈이었다.
황성빈은 바뀐 투수 김유영을 상대로 안타에 준하는 타구를 만들었다. 밀어쳐서 유격수 오지환에게 보낸 땅볼 타구가 묘하게 글러브에서 빠져나왔다. 수비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하는 오지환의 보기 드문 실책이었다. 공을 잡은 오지환은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레이예스가 평범한 2루쪽 땅볼을 쳤다. 포구를 한 2루수 신민재와 진루를 하던 황성빈과 충돌했다. 공을 1루로 뿌리지 못했다. 그 사이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와 1득점했다.
이후 전준우가 투수 앞 땅볼을 쳤다. 더블플레이를 염두에 둔 김유영이 공을 2루로 보냈는데 하필 송구가 뒤로 빠졌다. 공이 중견수까지 흘러갔다. 그 사이 황성빈이 홈으로 들어와 득점했다.
정말 이날은 황성빈이 뭘해도 되는 날이었다. 상황마다 묘하게 다 황성빈이 있었다. 이후 롯데는 4점을 추가하며 승기를 가져왔다.
황성빈은 이날 경기 활약에 대해 “오랜만에 선발출전한 게임에서 팀이 연패를 끊고 사직으로 돌아갈 수 있어 기쁘다”며 “우리 팀이 최근 선취점을 내주고 끌려가는 경기가 많았기 때문에 1회초 첫 타석부터 집중해서 출루하려고 했던 부분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앞서 황성빈의 제스처에 당황했던 KIA 투수 양현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상대 선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편하다. 그러나 투수를 괴롭혀야 되는 게 황성빈의 임무”라며 “내가 거기서 흔들리면 그게 황성빈이 해낸 거다. 나도 사람이라 표정에 드러났다. (앞으로 만나면) 내가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 맞춰서 준비해야 될 것 같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리그 핫가이는 앞으로도 상대팀 투수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도루는 리그 3위(9개)까지 올랐다. 여기에 말려드면 경기 흐름 자체를 넘길 수 있다. 선발로 출장하면 도루 1위(14개) LG 박해민도 위협할 수 있다.
이제 롯데 경계대상 1호는 리그 타율 1위(0.369) 빅터 레이예스가 아니다. 경기를 쥐고 흔드는 황성빈이다. 제발 출루하지 마라고 상대 감독이 속으로 외칠지 모른다. 전성기 시절 이용규가 ‘용규놀이’로 상대 투수를 괴롭힌 것처럼 황성빈에서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김태형의 용병술은 이제 황성빈에서 시작될 모양새다. 이미 2명의 대투수를 긁어버렸다. 8연패를 끊게 만든 LG전 라인업에서 김 감독은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황성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표정이 롯데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었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