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영화 ‘변호인’(2013) ‘강철비’(2017)로 선 굵은 작품을 만들던 양우석 감독이 내놓은 신작 ‘대가족’은 기시감이 든다. 6·25 전쟁 때 월남해 자수성가한 무옥(김윤석 분)은 의대를 다니다 스님이 된 아들 문석(이승기 분)을 향해 이북사투리로 고함을 쳤다. ‘1987’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대공수사처장 박처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설정은 곧 이해된다. 평만옥이란 공간과 김윤석 연기 덕택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빌딩 사이에 단층으로 있는 만둣집 평만옥은 수십억 떼돈을 벌고도 빌딩을 짓지 않고 살겠단 무옥의 고집불통 내면을 보여준다. 고조부 제사까지 모시는 유교적 의식 구조로 똘똘 뭉친 사람. 데뷔 이래 첫 코미디 연기는 이런 모습에서 출발했다.
‘대가족’은 20세기와 21세기 가족관이 변화하는 지점을 짚어냈다. 통계청 조사에서 1인가구는 15.5%(2000)에서 35.5%(2023)로 크게 늘어난 반면, 4인가구는 같은 기간 31.1%에서 13.3%로 감소했다. “조상님 뵐 낯이 없다”고 무옥이 내뱉는 말이 옛말이 된 건 가족 형태가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문석이 대학 시절 불임 부부를 위해 기증한 정자로부터 출발했다. 함씨 가문 대가 끊기게 된 무옥은 문석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어린 남매 민국(김시우 분)과 민선(윤채나 분)가 찾아오자 반가움에 “만세”를 외쳤다. 젊어 보이려 염색도 하고, 생전 처음 놀이공원에도 가며 지극정성을 쏟았다.
‘대가족’은 시대를 환기하지만, 실상 ‘핏줄’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진다. DNA 검사까지 하며 ‘내 새끼’ 집착을 보이던 문석은 친자 불일치 소견이 나오자, 처음엔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심사숙고 끝에 민국과 민선을 품기로 결심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기억 때문이다. 수녀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해외 입양되는 걸 목격하면서 쇠고집 같던 신념을 접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관계 실타래가 종반에 해소된다. 무옥의 변심 덕분이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10명이 넘는 고아를 입양하며 그들 부모가 됐다. 평만옥 지키며 늘 옆에 있던 방여사(김성령 분)와 재혼했다. 그토록 원하던 ‘대가족’을 이룬 건 무옥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집착 없이 남에게 베푸는 일)에 이르게 되면서다.
삭발까지 감행한 이승기는 코미디와 감동 코드 모두를 잡았다. 열애하는 대학생 문석에서 어린 주지스님 무애, 세월이 흘러 이마에 주름진 노승까지 입체적 캐릭터를 촘촘히 그려냈다. 위패에 모신 부모님을 향해 절을 올리며 흐뭇한 미소로 무옥과 화해에 이르는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큰스님(이순재 분)이 문석을 삭발하는 플래시백에선 백석 시 ‘여승’의 서글픔도 전해진다. 부모-자식간 인연을 상기하는 이순재 내레이션은 심금을 울린다.
“부모에게 아이란 무엇인가. 신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신을 우리는 간절하게 섬긴다.”
이승기는 “다시 봐도 저 말이 울컥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저 말이 더 와닿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스님이 자식이 있다는 코미디 설정에서 시작한 영화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곳곳이 부처, 일마다 불공)으로 끝을 맺는다. ‘국민 허당’ ‘발라드 황태자’를 거친 뒤 숱한 부침을 겪으며 완성된 연기는 한층 깊고 유려해졌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