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안 죽고 살아난 날 보니까 어때?”(박형식) “기분이 더럽죠.”(허준호)

손자뻘인 상대가 반말로 묻는다. 이에 악인은 존댓말로 대답한다. 전형성을 비껴간 장면이지만, 보는 순간 빠져들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 눈썹을 들썩이며 던지는 서늘한 표정에 순간, 확 빨려들어가게 된다. 허준호라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찬사가 쏟아졌다. 이 시대의 악인 염장선으로 분한 허준호의 모습에 칭찬이 자자하다. 지난 12일 막을 내린 SBS ‘보물섬’에서 매회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극을 끌고 갔다. 16회라는 긴 스토리를 끌고 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장선은 극 초반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 서동주(박형식 분)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며 악랄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주름까지 연기했다. 흰색 머리가 내려앉아 극적 아우라가 더했다.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한 박형식의 연기 역시 찬사를 받은 건 허준호가 팽팽하게 날 선 모습으로 받아준 덕분이었다. ‘유퀴즈’에 출연한 박형식은 “현장에서 (허준호를) 만났는데 털이 곤두섰다. 소름이 쫙 돋았다. 염장선이 앉아 있는데 희열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장선은 엘리트 출신 악인이다. 검사로 시작해 국정원장을 거쳐 법과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악으로 통칭하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철용 대통령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은 킹메이커다. 2조 원의 비자금으로 비선 실세로 실권 통치를 했다. 기존 마약이나 폭력 조직 두목이 아니기에 다른 결의 연기가 필요했다.

장선과 동주의 대결은 단순히 돈에서 그치지 않았다. 출생의 비밀까지 얽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치열하게 달아올랐다. 민주화 운동으로 안기부 고문을 받던 동주의 아버지 일도(이해영 분)를 구슬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장선의 지시로 자식을 죽일 뻔했던 일도가 뒤늦게 동주의 존재를 인지하지만, 킬러의 사주로 죽게됐다. 동주의 복수심은 불타올랐다. 장선은 이런 동주를 제압해야만 했다.

상대를 밀어붙이는 특유의 표정에서 감탄이 나왔다. 궁지에 몰리면서도 또다시 궁리를 모색해 위기를 모면하는 모습은 게임 속 ‘끝판왕’을 연상케 했다. ‘보물섬’ 제작진은 “동주의 복수로 인해 궁지에 몰린 장면에서 장선의 악인 본능이 제대로 폭발했다”며 “허준호의 열연이 극적 긴장감을 솟구치게 했다”고 칭찬했다.

연기 경력 30년을 훌쩍 넘겼다. 원로 배우 허장강의 아들로 데뷔 초기엔 빛을 보지 못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스스로 알을 깼다. 단역, 특별출연 등을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실미도’(2003)로 첫 천만 영화를 기록한 뒤 ‘이끼’(2010)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모가디슈’(2021)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 올해 드라마 ‘보물섬’에서 만개했다. 이제 잊히지 않는 대배우의 반열에 허준호 이름 석 자가 보인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