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태풍상사’가 되살린 IMF 시대의 감정선은 단순히 과거를 소환하는 복고적 장치가 아니다. 드라마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집단적 위기의 시간 속에서 무너져가는 일상과 다시 살아보려는 의지를 동시에 포착한다.

이준호가 연기하는 ‘강태풍’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청춘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살던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아버지의 무역회사를 떠맡은 채 경제 파국의 한가운데로 던져진다. 이 전환은 IMF 시절 국민이 체감했던 ‘어른이 될 수밖에 없던 청춘’의 압축된 은유다.

1997년 당시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으며 국가부도의 위기와 맞닥뜨렸다. 공장은 문을 닫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으다. ‘금 모으기 운동’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기였다.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매일 밤 TV 앞에 모였다. 드라마는 현실의 절망을 잠시 잊게 하는 피난처이자, 버텨야 한다는 다짐을 공유하는 창구였다. 그 해 안방극장을 지배한 작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인 건 MBC의 ‘그대 그리고 나’였다. 최고 시청률 66.9%를 기록하며 ‘국민 드라마’로 불린 이 작품은 위기 속에서도 지켜야 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IMF로 인해 해고, 부도, 이혼이 일상어가 된 시대에, ‘그대 그리고 나’는 인간 관계의 복원과 연대의 정서를 전면에 내세워 국민적 위로를 건넸다.

같은 해 MBC의 ‘별은 내 가슴에’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랑받았다. 최진실과 안재욱이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비극적인 사랑과 꿈을 그린 감성 멜로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뛰던 시기였기에, ‘별은 내 가슴에’는 현실을 잊고 감정의 온도를 회복하게 해주는 피난처가 되었다.

KBS1의 ‘정 때문에’는 가족극 특유의 따뜻한 리얼리티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일상은 계속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딪히고 화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1997년의 드라마들은 각기 다른 색깔로 그 시대의 정서를 대변했다. ‘그대 그리고 나’는 가족애로, ‘별은 내 가슴에’는 낭만으로, ‘정 때문에’는 일상의 온기로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 진한 이야기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시절, 텔레비전 속 드라마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감정의 방파제’였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어떤 상황이 됐건,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콘텐츠 업계의 본능이다. 요즘처럼 불황일수록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원한다. 그래서 제작사들은 공감과 위안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과거 IMF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7년 당시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당시 작품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낭만적 멜로나, 생존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은 가족극, 불공정한 사회를 향한 분노를 대리 표출한 복수극 등으로 대중의 감정을 해소시켰다”고 덧붙였다. khd9987@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