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규
김형규(왼쪽)가 지난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19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대회 남자 91kg급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산자르 뚜르스노프에게 판정승을 거둔 뒤 기뻐하고 있다. 제공 | 아시아복싱연맹(ASBC)

시상대 김형규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웃고 있는 김형규. 제공 | 대한복싱협회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불운한 복서라고만 생각했는데…이런 날이 왔다.”

김형규(28·울산광역시청)가 한국 남자 복싱의 새 역사를 썼다. 그는 지난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19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대회 남자 91㎏급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산자르 뚜르스노프에게 3-1 판정승, 한국 남자 복싱 역사상 최초로 이 대회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2011년 이 대회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거머쥔 그는 8년 만에 헤비급마저 제패하면서 재도약의 디딤돌을 놓았다. 얻어걸린 금메달도 아니다. 준결승에서도 2016 리우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카자흐스탄의 바실리 레빗을 KO로 꺾었다. 세계 아마추어 복싱계를 장악하다시피 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강자들을 연달아 꺾으면서 2020 도쿄올림픽 전망을 밝혔다.

김형규는 귀국 이튿 날인 28일 본지와 전화 통화를 할 때까지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심판이 내 손을 들어준 순간 ‘내가 (올림픽 메달리스트 등)얘네들을 다 이겼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8년 전 금메달 땐 스무살이었다. 겁 없이 달려들 때였다. 최근 몇 년간은 군 문제로 인해 압박감이 컸다.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고 고백했다. 특히 복싱협회가 한동안 국내 복싱계 파벌 다툼과 국제 외교력 부재 등으로 내홍을 겪으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선수에게 돌아갔다. 김형규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돼 마음고생한 적이 많았다.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6개월여 앞두고선 남자 81㎏급과 91㎏급, 91㎏ 이상급이 대회 체급에서 제외돼 김형규는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난 참 운이 없구나. 정말 불운한 복서구나라고 생각했다. 국제복싱협회와 국내 단체간의 갈등도 발생하면서 (대회에서)내가 손해보는 것도 많다고 느꼈다. 그저 남 탓을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반전의 열쇠가 된 건 기술이 아닌 심리였다. 우승 원동력을 묻는 말에 단 한 번도 기술 요소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선배들을 보면서 아무리 복싱계 사정이 좋지 않아도 내 위치에서 꿋꿋히 열심히 하면 언젠간 한 번은 얻어걸린다는 생각을 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번 대회는 이전과 다르게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그러다보니 경기마다 편안하게 내 스타일이 잘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수들 경기를 보면서 참 열정이 강하다고 느꼈다. 사실 난 별것도 아닌데 그동안 겉멋이 많이 든 선수였다. 내·외적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경기했더니 결과가 따랐다”고 덧붙였다.

김형규-과거-사진(완)
중학교 3학년 당시 177cm, 52kg으로 플라이급에 출전했던 김형규가 소년체전 금메달을 따낸 뒤 최우수선수상 받고 아버지와 기념촬영한 모습. 제공 | 김형규

김형규는 경남 마산 양덕중학교 시절 처음 복싱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난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교실 칠판에 급식비 안 낸 사람에 늘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께서 ‘복싱부에 들어가면 급식비가 면제된다. 운동 능력이 좋으니까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급식비 미납 명단에서 탈출하고자 시작한 복싱은 그에게 딱 맞는 운동이었다. 김형규는 “처음엔 체중 감량이 너무 힘들어서 중학교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결국 경남체고까지 가게 돼 복싱의 길을 걷게 됐다”고 웃었다. 중학교 당시 그는 키 177㎝였지만 몸무게는 52㎏에 불과했다. 플라이급으로 뛰었다. 그러다 경남체고 진학 이후 헤비급으로 올라섰다. 그는 “내가 체중 빼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니까 당시 코치께서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으면서 운동해보라’고 하시더라. 거기에 혹해서 -91㎏을 뛰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오는 10월 러시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과 내년 도쿄올림픽을 대비한다. 김형규는 “이번 금메달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복싱 강대국 선수들은 언젠간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는데 이번에 한 번 넘었다.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 노련미를 쌓아서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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