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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피지도 못한 꽃이 허망하게 졌다. 아니,무참하게 꺾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움켜 쥐었던 희망의 줄을 스르르 놓으면서 남긴 문자 메세지가 가슴을 후벼 판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죄를 밝혀달라”는 절망의 문자 메세지는 체육개혁의 절박함을 웅변해주고도 남는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트라이애슬론 유망주 고(故) 최숙현 선수의 비극적인 사건에 온 나라가 비탄에 빠졌다. 분노의 목소리도 높다. 한국 체육의 고질적 병폐인 반인권적 폭력 문제는 과연 언제쯤 뿌리 뽑힐지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해 쇼트트랙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성폭행 사건이후 체육계는 1년 반만에 또다시 꽃다운 여자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추악한 폭력 사건에 만신창이가 됐다. 분노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녀린 여자 선수를 사지의 벼랑으로 몰고간 이번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체육계 폭력 사태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은 귀담아둘 만하다. 고인은 지난 2월 경주시청에 처음으로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이 사건은 무려 4개월 동안 수면아래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죽기 전 4개월 동안 폭력에 짓눌려 애간장을 태웠던 최 선수의 사연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체육계에 뿌리깊은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한 게 꽃다운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트리거(trigger)라는 분석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

폭력의 가해자가 누구이며 어떤 폭력행위가 있었는지는 이번 사태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미 감독 ,팀닥터,선배 선수 등 폭력에 가담한 4명의 범죄행위를 입증할 만한 다수의 증언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결정적 증언과 함께 이번 사태에 분노하는 사회적 관심 또한 들끓고 있어 사건 실체를 뒤집을 만한 반전의 동력마저 별로 없다는 점도 이러한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폭력에 연루된 피의자 처벌에만 집중했다간 자칫 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사건을 축소·은폐한 범죄행위를 흘려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어서다.

최 선수가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결정적 배경은 폭력 피해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구조가 어린 영혼에 깊은 상처를 안긴 결정적 동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최 선수가 억울함을 호소했던 공공기관은 무려 7곳에 이른다. 경찰과 검찰을 비롯해 경주시청, 경주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국가인권위원회 등 7개 기관은 적어도 피해자의 상처받은 마음을 누그러뜨릴 만한 그 어떤 후속조치도 내려주지 못했던 것 같다. 공공기관의 입장에선 주어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죽음이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선 그 어떤 주장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4개월동안 무려 7개의 공공단체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건 야멸찬 냉대와 무관심이 전부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다른 체육계 폭력 사건과 달리 4개월간 사건의 실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축소한 ‘침묵의 카르텔’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태에서 국민을 더욱 화나게 만든 건 따로 있다. 고인이 그토록 애절하고 절박하게 억울함을 호소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공공기관들의 달라진 행동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언급한 바로 다음날인 지난 3일,앞다퉈 성명서를 내고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앞당겨 열기로 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가증스러움을 뛰어넘어 치 떨리는 분노를 느꼈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최숙현 선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지친 영혼을 보듬어주지 못한 ‘침묵의 카르텔’이 야기한 ‘사회적 타살’에 다름 아니다. 철인(鐵人)을 사지로 내몬 ‘침묵의 카르텔’ 구조를 이번 기회에 규명하지 못하면 체육개혁은 또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인 폭력 문제는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하기 보다는 행동을 규정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축소·은폐하고 더 나아가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체육계의 뿌리깊은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침묵의 카르텔’,이게 바로 체육계에 만연된 폭력의 심층부에 똬리를 튼 결정적 구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최숙현의 용기가 체육개혁의 밀알이 되기 위해선 숨겨진 그 구조를 찾아내야 한다. 최윤희 제 2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문화체육관광부 특별조사단이 놓쳐서는 안될 이번 사건의 핵심 열쇠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