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백설공주’는 동화다. ‘콩쥐팥쥐’ ‘햇님과 달님’ 같은 전래동화처럼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다. 서사는 단선적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 주인공의 외모 역시 이야기에 빠져드는 데 도움을 준다. 공주는 아름답고, 마녀는 추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보편적 정서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몰입을 더하기 위한 장치다.

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백설공주’는 이런 관습을 깨려고 했다. 공주의 외모가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훌륭하다고 반복적으로 설득한다. 문제는 이런 설득이 관객에게 그리 호소력 있게 들리지 않다는 점이다. 부모가 지어준 ‘스노우 화이트(snow white)’ 즉 백설공주라는 이름에 걸맞은 교감이 관객과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 내내 몰입감이 깨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백설공주 역을 맡은 레이철 제글러는 1937년 원작 애니메이션을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라고 비판한 바 있다. “왕자가 백설공주를 스토킹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비평가 입장이라면 충분히 맞는 이야기다. 양성평등 시대에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대가 없는 헌신이라니 요즘 시대엔 맞지 않다. 다만, 백설공주로 환상을 보여줘야 하는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가 이러면 곤란하다.

제글러가 SNS에 “백설공주 역할을 위해 내 피부를 표백하진 않을 것”이라고 반발할 정도라면, 캐스팅하지 말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일곱 난장이’라는 설정도 왜소증을 비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동안 ‘백설공주’가 영화화되지 않았던 건 이런 위험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견과 차별을 깨부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변주해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해 개봉한 ‘위키드’가 224만 명의 국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것을 보라. 핵인싸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가 따돌림을 당하는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분)를 보듬고 자신이 가진 본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모습은 충분히 공감을 살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백설공주’는 후반부에 이르러 변주한다. 마녀가 준 사과를 먹고 죽었지만,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 공주는 사악한 여왕(갤 가돗 분)을 성 앞에서 만나 호소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계엄령을 내려 무장한 군인에게 공주는 ‘옆집에 살던 김아무개’와 같이 호소하며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것을 요구, 결국 여왕을 성에서 쫓아내기에 이른다.

‘레미제라블’의 민중혁명적 장면도 언뜻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전복의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공주의 호소에 주변부적으로 들러리를 서는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퀀스마다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엮고, 이를 인과적으로 풀어내며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요소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뮤지컬 영화로서는 훌륭하다. 무려 2억 6940만 달러(한화 2177억 원)가 투입됐다. VFX(특수효과)가 결합돼 보여주는 성, 숲, 자연 풍광 등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디즈니가 가진 기술력과 IP가 왜 중요한지를 시각적으로 충분히 보여준다. 물론 그것뿐이라는 게 아쉽다. 디즈니가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됐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