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유미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적 메시지 제시
쾌락의 늪, 아름다운 가면 속 가장 위험한 유혹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커다란 액자 속에 천사같이 빛나는 한 남자가 있다. 하얀 도화지에 물감 한방울 묻지 않은 순백의 그. 모든 이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함에 매료된다.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다. 하지만 쾌락이라는 유혹에 빠지는 순간, 가장 볼품없고 천박한 모습으로 추락한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9년 만에 돌아왔다. 2016년 초연 당시 도발적이면서도 미학적 연출로 시선을 빼앗았던 작품은 한층 더 화려하고 신비로운 무대로 관객 앞에 섰다. 22세 미소년 ‘도리안 그레이’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시각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작품은 1854년 오스카 와일드를 ‘유미주의(唯美主義)’의 새로운 리더로 세운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재창작됐다. 런던 사교계에 나타난 귀족 청년 ‘도리안’에게 매혹된 화가 ‘배질 홀워드’는 자신이 그린 그의 초상화를 통해 ‘선(善)’과 ‘악(惡)’을 경험한다.

‘도리안 그레이’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대비다. 작품의 흐름은 인물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듯, 인간의 서로 다른 시곗바늘처럼 보인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때 묻지 않은 아기는 어른이 돼가면서 순수함을 잊는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배질’은 ‘도리안’과 그의 초상화 앞에서 “넌 영원히 아름다울 거야, 저 초상화처럼”이라며 미소 짓는다. 사람들은 모두 “후광이 빛난다”며 그를 신(神)처럼 여긴다. 그때의 ‘도리안’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듯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헨리 워튼’의 쾌락주의에 빠지는 순간, ‘도리안’의 초상화는 검게 그을려 점점 피로 물든다.
그의 초상화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천당과 지옥 그리고 연옥마저 존재한다. 하얀 비둘기가 전하는 평화는 순수한 청년의 타락으로 날개가 부러진다. ‘도리안’을 쾌락의 늪으로 꾀한 이들조차 혀를 차며 그를 피한다. 죄악으로 물들여진 타락한 천사는 최악의 최후를 예고한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부정하려는 본능이 있다. ‘도리안’ 역시 쾌락의 유혹을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고 외친다. 이 모습에 ‘배질’은 ‘도리안’의 ‘껍데기’를 사랑한 것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라며 그를 흔들어 깨우려 하지만, 오만의 늪에 빠진 ‘도리안’을 회생시킬 수 없다.
이들이 함께 같은 곳(유미주의)을 바라봤던 커다랗고 화려했던 거울은 타락한 천사로 인해 빛을 잃어간다. 얼룩진 영혼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에게 진정한 행복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양옆의 거울은 악마의 지옥 불에 의해 그을려 사람의 형상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도리안’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처음 모습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라는 성경의 한 구절처럼 세상에서 지녔던 아름다움도, 죄도 죽으면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순리 때문이다
작품은 외모지상주의로 몰락한 한 귀족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외모가 아닌 내면의 진정한 아름다움, 도덕성을 예술로 표현한다. 사람은 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메신저 ‘도리안’ 역 윤현석·윤소호·재윤·문유강, ‘헨리’ 역 최재웅·김재범·김경수, ‘배질’ 역 손유동·김지철·김준영 등이 연기한다.
도발적이지만 미학적 연출로 선과 악의 경계선을 그리는 ‘도리안 그레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연은 오는 6월8일 서울 대학로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올 시즌 마지막 공연을 올린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