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 닿지 않은 자유…‘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인 감행

권력에 눈먼 자들의 몸부림…끝나지 않은 피비린내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대한민국의 정권이 바뀌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 싸움 중이다. 고래 싸움에 또다시 국민의 등만 터진다. 공교롭게도 피 묻은 왕의 자리와 어긋난 군중심리를 고발하는 연극 ‘킬링 시저’가 정치 이슈 속에 공연 중이다. 자유와 정의를 외치지만, 누군가는 죽고 죽이는 비인간적 행위를 묵직한 메시지로 대변한다.

연극 ‘킬링 시저’는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작품은 이상과 현실, 정치적 명분과 인간적 야망, 우정과 배신,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의 드라마를 오묘한 심리전으로 풀이한다.

로마 공화정의 절대적 지도자인 ‘시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 가장 믿었던 친구 ‘브루터스’의 손에 암살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렸던 ‘브루터스’이지만, ‘시저’를 처치해야 한다는 ‘카시우스’ 등 원로원들의 집요한 꾐에 결국 칼에 피를 묻힌다.

작품은 권력에 눈먼 자들의 비열함을 고발한다. 암살을 ‘혁명’이라며 고귀한 단어를 들먹인다. 살인을 끝낸 후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다음 희생양을 찾는다. 국민을 위한 정의와 자유,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민중을 선동한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파멸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저’와 ‘카시우스’의 눈에 똑같은 상처가 있다. 육신과 정신이 찢긴 죽은 자들의 비열한 피눈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인물의 흔적은 정의와 탐욕의 차이다. 죽어서도 신처럼 존경받는 ‘시저’와 정치적 야망에 허덕이는 ‘카시우스’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손에는 피 묻히지 않으려고 ‘브루터스’의 순수함을 이용한 원로원들이 한 명씩 처단된다. 헛된 죽음은 없다. 죄인의 목숨일지라도 이는 심판에 의한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했던 해방은 없다. 비극의 끔찍함과 두려움, 경멸과 공포만이 공연장을 싸늘하게 얼린다.

◇ ‘죽음’의 새로운 정의…인간이길 포기한 권력

‘킬링 시저’가 처음 소개됐을 당시 출연 배우들이 화제를 모았다. ‘시저’ 역 김준원과 손호준, ‘카시우스/안토니우스’ 역 양지원, ‘브루터스’ 역 유승호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이라는 반응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해태’와 영화 ‘집으로’의 꼬마를 상상한다면 오산이다. 이들의 과감한 도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실력파 배우’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모함과 음해로 암울하다. 하지만 장면들이 아름답다. 칼과 창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조차 신비롭다. 비열한 원로원들의 몸짓과 손짓은 마치 현대무용과 한국무용, 군무를 합쳐놓은 듯하다. 덕분에 어두침침한 스토리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빛을 담고 있다. 이는 죽음과 비명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김정 연출의 생각을 그대로 무대로 옮긴 결과다.

반구로 구성된 무대는 놀이터 같다. 배우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오르고 내려가면서 사방으로 뛰기도 한다. 한가지 공통점은 죽음을 부른 죄인들은 최후의 순간에 굴러떨어진다. 원죄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가장 높은 곳에는 ‘시저’와 ‘카시우스’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무게가 다르다. 품위 있게 앉아있는 ‘시저’와 달리, ‘카시우스’는 삐딱한 자세다.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곧음과 삐뚤어짐의 상반된 내면을 꿰뚫는다.

공연장 특성상 관객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이 또한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관객의 눈높이에서 신이 되고 싶은 자들을 심판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민사회의 이상은 변함없다. 지금도 정체성과 정치적 윤리,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시대와 정의의 반복성에 대한 메타 비극 ‘킬링 시저’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후일담을 관객과 함께 해석해나간다.

한편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 ‘킬링 시저’는 7월20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