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용일 기자]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묵직한 시간…말보다 진심을 다하겠다.”

인고의 9개월이었다. ‘심중유심(心中有心·이성으로 감성을 억제)’의 가치로 마음을 다잡았다. 축구대표팀 홍명보(57) 감독은 취임 전부터 예기찮은 폭풍을 마주했지만 지도자로 두 번째 월드컵 본선 무대를 향하는 데 성공했다. 홍 감독은 스포츠서울 창간 40주년(1985년 6월22일 1호 발행)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가 도달하지 못한 곳을 향해야 한다. 원정 16강(2010 남아공·2022 카타르)은 두 번 달성했으니 그 이상을 보고 뛸 것”이라며 2026 북중미 월드컵 목표를 제시했다.

◇조기 본선행 속 ‘야유’와 싸우다

홍명보호는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B조에서 무패(6승4무) 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 축구는 11회 연속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는다. 다만 홍 감독은 월드컵 예선 기간 건설적 비판보다 힐난과 자주 마주했다. 지난해 각종 행정 난맥으로 물의를 일으킨 대한축구협회(KFA)는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감독 경질 이후 새 A대표팀 사령탑을 선임하는 과정에서도 매끄럽지 않은 행정으로 지탄받았다. 최종적으로 선임된 홍 감독에게도 비난 화살이 몰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0월 홍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 그가 관여하거나 특혜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KFA 전력강화위원회(전강위)가 최종 10차 회의 이후 외국인 후보와 추가 면접을 진행하지 않고 1순위로 뽑힌 홍 감독 선임을 바로 진행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홍 감독을 피해자로 본 셈이다. 그럼에도 사익을 추구한 일부 무리는 KFA와 홍 감독을 엮어 부정적 여론을 선동하기도 했다. 선택적 노출 경향이 짙은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홍 감독과 관련한 가짜 뉴스를 접하고 비난 대열에 합류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홍 감독은 왜 침묵했을까. 그는 “세상이 내가 처한 상황을 보고 들으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억울해도 ‘아니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 자격이 없었다면 자진해서 물러났을 거다. 하지만 전강위로부터 1순위로 뽑혔고 정식으로 제안받았다.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을 뿐”이라고 했다. 일부 팬과 이강인 등 대표팀 핵심 자원은 홍 감독의 사정을 직·간접적으로 대변,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이라며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명확해지더라. 성향 자체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스스로 냉정해졌다. 어떻게 대표팀을 발전시킬지만 몰두하게 됐다”고 돌아봤다.

◇울산 팬은 나를 욕할 자격 있다

세상의 외면이 한스럽지만 홍 감독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는 건 울산HD 팬이다. 지난해 KFA는 클린스만 감독 체제로 나선 카타르 아시안컵 때 불거진 대표팀 내분 사태, 베스트11 고정화 현상으로 인한 경쟁 구도 약화 등을 문제로 여겼다. 새 사령탑 선임을 두고 내부 문화를 바로잡고 새 경쟁 동력을 입힐 국내 지도자를 우선으로 여겼다. 연령별부터 A대표팀 사령탑을 경험하고 당시 울산의 K리그1 2연패를 이끈 홍 감독이 1순위로 평가받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KFA의 어수선한 선임 과정에 홍 감독은 울산 잔류 의지를 보였다. 그러다가 장기 비전을 꺼내든 KFA의 설득에 더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또 지도자 커리어에서 유일한 오점인 월드컵(2014 브라질) 실패를 만회하고 새 미래를 그리고픈 열망도 생겨났다. 반면 울산 팬은 급작스럽게 수장을 잃게 된 만큼 실망이 가득했다. 홍 감독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울산 팬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정말 죄송하다. 울산은 지도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임팩트 있는 시간을 보낸 곳이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미래를 입히다…‘커몬 골’ 로드 투 북중미

자신에게 몰입한 시간 속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야유’로 가득했던 지난해 9월 팔레스타인과 첫판을 무득점 무승부로 마쳤지만 이후 중동 원정을 포함해 4연승 가도를 달렸다. 조기 본선행의 디딤돌이었다. 이 과정에서 홍 감독은 배준호(스토크시티) 오현규(헹크) 등 ‘젊은피 유럽파’를 중용하며 미래 동력을 입혔다. 또 예선 10경기에서 교체 자원이 9개의 공격 포인트(7골 2도움)를 합작하는 등 실리적인 용병술로 성숙한 지도력을 뽐냈다.

홍 감독은 “팔레스타인전 이후 (2차전) 오만 원정에서 선수가 누구랑 어울리고 식사하는지 관찰한 적이 있는데, 팀이 갈려져 있음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젊은 선수를 쓰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10월 배준호, 오현규 등이 맹활약하며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태극마크와 주전 자리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다시 생겨났다”고 떠올렸다.

불안한 3선, 본선 수준의 스트라이커 경쟁력 확보 등 여전히 과제는 많다.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 대회는 본선을 1년 앞둔 이 시기부터 맡았다. 선수 파악에 어려움이 따랐다. 지금은 K리그 감독도 했고 주요 선수 장, 단점을 파악한 상태”라고 자신 했다. 또 “본선을 앞두고 (시즌을 마친) 유럽파의 컨디션은 불명확하다. 북중미 지역 무더위로 체력전도 예상된다. (본선 직전) 컨디션이 좋고 잘 뛰는 선수를 발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국가대표로 사명감을 강조했다. 그는 “대표팀은 단시간 모여 준비하기에 완벽한 컨디션, 전술을 꾸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중요한 건 ‘커몬 골(Common Goal·공통의 목표)’이다. 우리 스스로 지향점을 찾는 것”이라며 “과거엔 정신력, 애국심을 강조했지만 세상이 달라졌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어 “난 역지사지에서 찾는다. 선수에게 ‘우리를 돕는 스태프나 협회 직원, 식사를 챙겨주시는 아주머니 등을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고 한다. 우리 역시 프로답게, 국가대표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니저형 지도자’로 거듭난 홍 감독은 역사상 가장 개성을 지닌 대표팀의 원 팀을 지향하며 북중미를 바라본다. 지도자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선언한 그가 온갖 풍파를 딛고 마지막엔 웃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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