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힐링 드라마가 사라졌다.
한동안 드라마는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두는 방식으로 사랑받았다. 큰 사건은 없어도 됐다. 누군가 밥을 차리고, 하루를 버티는 장면 그 자체가 ‘이야기’였다. 시청자는 사건보다 정서를 따라갔다. 어떤 작품은 다 보고 나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흐름이 달라졌다. 갈등은 더 강해졌고, 한 회차만에 반전이 터진다. 캐릭터는 곧장 극단으로 몰린다. 사랑도, 권력도, 복수도, 죽음도 즉각적으로 소비된다. 이른바 ‘도파민형 콘텐츠’가 주류가 됐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플랫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초반 이탈을 막기 위한 자극적 장치가 사실상 필수 요소”라며 “이러한 구조가 콘텐츠 전반의 톤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화제작들만 봐도 분명하다. TV조선 ‘닥터신’은 첫 회부터 ‘뇌 체인지 수술’이라는 파격 설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천재 의사 신주신이 의식불명에 빠진 연인 모모를 살리기 위해 금기의 수술을 감행한다는 구조 자체가 이미 일상 드라마와는 결이 다르다. 임성한(피비) 작가 특유의 말맛 강한 대사는 방영 직후부터 밈으로 번졌다.
ENA ‘클라이맥스’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검사 방태섭의 정계 진출 선언, 살인사건 재부상, 부부 관계의 균열처럼 사건과 반전을 연쇄적으로 밀어 넣었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판을 키우는 쪽으로 향했다. 이런 방향은 수치로도 드러났다. ‘클라이맥스’는 2049 타깃 시청률 1.3%로 자체 최고를 기록했고, 월화드라마 1위에 올랐다. 즉 지금 시청자의 반응은 ‘정서적 축적’보다 ‘즉각적 몰입’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고착화된 구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은 첫 주, 첫 회, 심지어 첫 10분 안에 시청자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갈수록 빠른 자극을 택한다. 인물의 감정이 천천히 쌓이기보다 사건이 먼저 터진다. 시청자는 사건을 따라가며 반응한다. 이렇게 되면 일상의 결을 천천히 움직이는 힐링 드라마는 출발부터 불리하다. 정적인 장면, 작은 감정, 느린 리듬은 “재미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따라서 도리어 재조명되는 작품이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다. 아이유, 박보검을 비롯해 주조연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호흡을 바탕으로, 현실적 소재를 깊이 있고 아름답게 풀어냈다는 평가 속에 정서적 여운을 남긴 드라마다. 지금의 도파민형 드라마와는 달랐다.
물론 이후 힐링 드라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전면에 서지 못하고 있다. 지금 시장에서 더 유리한 건 즉각적으로 시청자들을 잡아끌 수 있는 작품이다.

현재 드라마 시장에서 아쉬운 것은 힐링 드라마의 ‘부재’ 자체보다, 아예 전략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느린 감정, 작은 위로, 일상의 결이 설 자리를 잃는 순간, 드라마는 점점 더 흥분만 남기고 여운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폭싹 속았수다’ 이후 비슷한 온도의 작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지점에 있다. khd9987@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