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글·사진 | 화성=원성윤 기자] 국순당의 연구 역량이 집약된 화성 ‘박봉담’에서 만난 신우창 연구소장(이학박사)은 25년 넘게 우리 술의 과학화를 이끌어온 산증인이다. 1968년생인 그는 본래 경북대에서 미생물 유전학을 전공하던 청년 과학자였다. 학업의 기로에서 방황하며 깊은 슬럼프(Depressed)를 겪던 그를 전통주의 길로 이끈 것은 국순당 창업주 고(故) 배상면 회장이었다. 당시 배 회장이 보여준 뜨거운 열정은 과학자의 길을 고민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돼 주었다.

◇ 미생물 수만 개의 오케스트라, ‘복합미의 질서화’

신 소장이 정의하는 한국 술의 정체성은 ‘복합성(Complexity)’이다. 이는 단일 균주(코지)로 깔끔함을 추구하는 일본 술(사케)과는 궤를 달리한다.

“전통 누룩에는 수천, 수만 종의 미생물이 공존합니다. 저는 이를 축구팀에 비유하곤 하죠. 골을 잘 넣는 ‘손흥민’ 한 명으로 11명을 채운다고 최고의 팀이 되진 않습니다. 수비수도, 미드필더도 필요하듯 이름 없는 미생물 하나하나가 제 역할을 할 때 우리 술 특유의 깊은 맛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 복합성은 자칫 ‘통제 불능’의 거친 맛으로 흐르기 쉽다. 신 소장은 “수많은 미생물의 상호작용을 과학적으로 통제해 질서 정연한 맛을 구현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그가 공을 들인 백세주 리뉴얼 역시 과거 ‘보약’ 같은 약재 향을 덜어내고, 곡물과 과실의 풍미를 살려 젊은 세대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 집중했다.

◇ “진정한 프리미엄은 ‘합의된 품질’에서 나온다”

최근 주류 시장의 ‘프리미엄’ 열풍에 대해서는 냉철한 진단을 내놨다. 그는 시중의 고가 제품들이 단순히 쌀 함량이나 도수만 높여 가격을 올리는 현상을 경계한다.

“프리미엄이란 오랜 시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축적된 ‘품질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와인의 AOC처럼 우리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고급화의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그의 철학이 담긴 술이 바로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코드명으로 탄생한 박봉담 막걸리다. 발효 중 특정 시점에 향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절정의 순간’을 포착해 병에 담았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공정이지만, 그는 “이 술을 마시며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전성기를 떠올려보길 바란다”며 술에 서사와 가치를 담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 법적 규제 넘어 복원한 ‘이화주’, 술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신 소장은 전통의 복원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혁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008년 고려시대 술인 ‘이화주’를 복원할 당시, 현대의 주세법이 규정하는 산도(Acidity) 기준을 초과해 ‘불법’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기술이 열악하던 시절의 낡은 규제가 전통의 복원을 가로막고 있었다”며 정책 당국을 설득해 기준을 바꾸고 우리 술의 다양성을 확보한 일화를 전했다.

그는 은퇴 전 ‘술은 왜 사라지지 않았나’라는 주제의 책을 준비 중이다.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알코올은 해로운 물질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상 모든 문화권에서 술은 접신(接神)과 소통의 매개체로 살아남았다.

“적절한 통제 속에서 즐기는 술은 삶의 활력이 돼 줍니다. 술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형태는 무알코올이나 저도주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춰 진화할 것입니다.”

◇ ‘발견’의 공간 박봉담, “질은 양에서 나온다”

화성의 박봉담은 신 소장에게 ‘발견’의 장소다.

“설계도대로 만드는 발명이 아니라, 수많은 테스트 속에서 의외의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 개발입니다. 질(Quality)은 결국 압도적인 양(Quantity)의 테스트에서 나옵니다.”

‘한 줌의 쌀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그의 좌우명은 이제 박봉담의 작은 탱크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수만 개의 미생물을 지휘하는 과학자의 열정이 K-전통주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