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글·사진 | 강진·해남=원성윤 기자] 대한민국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은 단순히 육지의 끝자락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넘어선다. 이곳은 한반도 외곽을 하나로 잇는 약 4500km의 장대한 걷기 여행길, ‘코리아둘레길’이 교차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남해안의 수려한 경관과 쪽빛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남파랑길’의 종착지이자, 서해안의 붉은 노을과 드넓은 갯벌을 품은 ‘서해랑길’이 첫걸음을 떼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우리 관광 산업의 패러다임은 랜드마크 중심의 단순 관람에서 지역 고유의 길을 걸으며 머무는 체류형 걷기 여행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해남의 둘레길은 이러한 질적 도약을 증명하는, 가장 살아 숨 쉬는 ‘로컬 K-관광’의 생태계 그 자체였다.

◇ 남파랑길이 품은 사유의 길,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해남 땅끝으로 향하는 남파랑길 여정에서 이웃한 강진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강진만에 안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남도 걷기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머물렀던 다산초당에서 출발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고즈넉한 백련사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다산과 백련사의 혜장스님이 학문과 차(茶)를 나누며 교유했던 이 약 800m의 숲길은, 수백 년 전 두 지음(知音)이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사유와 성찰의 길’이다. 짙푸른 다원의 싱그러운 기운과 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이 어우러진 풍광은 거친 바닷길과는 또 다른 정적인 위안과 묵직한 감동을 여행자에게 선사한다.

◇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땅끝마을과 서해랑길의 교차점

강진을 지나 남파랑길의 마지막 여정을 걷다 보면, 마침내 땅끝마을에 다다른다. 육지가 잦아들고 바다가 열리는 이곳은 남파랑길이 끝남과 동시에 서해랑길 1코스가 힘차게 첫걸음을 내딛는 교차점이다. 송지면 땅끝마을 바닷가에 우뚝 선 땅끝탑은 그 묵직한 상징성을 대변한다. 특히 땅끝마을은 일출과 일몰을 같은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맴섬 사이로 떠오르는 붉은 아침 해는 새로운 희망을, 서해의 지평선 너머로 타들어 가는 저녁 노을은 하루의 고단함을 포근히 달래준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서해랑길은 남파랑길과는 또 다른 풍경의 결을 선사한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광활한 갯벌과, 남도의 끈끈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강한 황톳길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이나 다큐멘터리 ‘한국기행’ 등 미디어에서 땅끝마을을 지속적으로 조명해 온 이유 역시, 끝이라는 단어 이면에 담긴 새로운 출발의 역동성을 뷰파인더에 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코리아둘레길, 대한민국 메가관광권의 핵심 앵커

강진과 해남 땅끝마을을 관통하는 코리아둘레길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산책로를 넘어, 지역 경제의 핏줄을 돌게 하고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K-컬처 산업의 범주가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현대의 관광객들은 수동적인 관광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은 두 발로 둘레길을 걸으며 동네 주민이 찾는 로컬 식당의 문을 두드리고, 지역 특유의 문화와 결합된 ‘초개인화된 로컬 체험’을 갈망한다.

해남을 비롯한 강진, 나주 등 여러 지자체가 스포츠 마케팅과 전지훈련 유치를 걷기 여행 코스와 연계하는 전략은 훌륭한 로컬 경제 활성화 모델이다. 걷기 여행의 매력과 스포츠 이벤트가 결합돼 발생하는 생활인구 유입은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한 해남126호텔과 같은 거점 숙박 시설의 이용과 지역 식당에서의 실질적인 소비로 이어져 비수기 경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이는 수도권에 80% 이상 집중된 관광 수요를 거점 밖으로 분산시키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메가관광권’ 정책 목표와 완벽히 궤를 같이한다. 코리아둘레길이야말로 대한민국 관광 산업 생태계가 질적 성장을 이루는 최전선에 서 있는 셈이다.

◇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강진 백련사 동백림의 고요함부터 남파랑길의 끝자리이자 서해랑길의 첫자리인 해남 땅끝에서의 여정은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특히 노란 들꽃이 반겨주는 해남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돌 방파제와 탁 트인 남도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흙바닥의 질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일은 화려한 도심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원초적인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한반도의 끝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첫걸음을 내딛는 코리아둘레길. 이번 주말, 머릿속 복잡한 상념을 비우고 가벼운 배낭 하나 멘 채 남도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두 발로 직접 땀 흘리며 걸어 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진짜 인생 여행은 완성돼 갈 것이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