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왕진오기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데 모은 불교 경전 총서인 대장경. 대장경 제작은 문화 역량을 집대성한 국가 프로젝트의 성격으로 그 시대 불교 사상과 인쇄 기술의 정화를 보여준다.
▲국보 제241호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사진=문화재청)
한국의 대장경은 1000년 전인 고려 현종 2년(1101년) 목판에 새기기 시작해 1087년 완성한 초초대장경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2차 침입기인 1232년 불타 없어지자 1237∼51년 사이에 다시 만든 것이다.
당나라의 현장(玄裝, 602∼664년)이 번역한 반야부(般若部)에 속한 모든 경전의 총서로서 천함(天函)부터 내함(奈函)까지의 60개함에 600권이 수록됐다. 초조본 반야경은 국내에 몇권, 일본 대마도에 여러 권이 전해지지만 이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가 가장 이른 시기의 인출본에 해당한다.
이 대장경은 이건희 삼성 회장 소유로 1988년 6월 16일 국보 제241호로 지정됐고,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관리하고 있다.
목판에 글자를 양각으로 새기고 닥종이에 찍은 이 경전은 두루마리로 말아 펼쳐볼 수 있는 권자본(卷子本)으로, 세로 29cm, 가로 50cm-51cm 크기의 23장을 이어 붙였다.
▲국보 제241호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사진=문화재청)
대반야바라밀다경은 줄여서 ‘대반야경’, ‘반야경’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존재물 자체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공(空)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반야심경’이라고 부르며 종파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읽고 외우는 경전이다.
초조대장경은 이후에 만들어진 해인사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하며 먹색이 선명하고, 해인사대장경과 글자 수가 다르고, 끝에 간행년도를 기록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피휘(避諱: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와 약자(略字)가 나타난다.
또 초조대장경은 책의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서 대체로 ‘장(丈)’자나 ‘폭(幅)’자를 쓰는데 비해 해인사대장경은 ‘장(張)’자로 통일돼 있다.
이 책의 경우에도 판을 새긴 기록이 생략됐는데, 이는 송 태조의 조부의 이름자인 ‘경(敬)’자와 같은 음을 가진 ‘경(竟)’자의 마지막 한 획을 생략해 피휘(군주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한 것이다.
▲국보 제241호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사진=문화재청)
책의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서도 본문 앞의 여백에 ‘장(丈)’자가 새겨져 있으나, 해인사대장경의 경우는 본문 끝에 ‘장(張)’자가 사용되고 있다.
인쇄상태나 종이의 질로 보아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처음 찍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 남아 있는 초조본반야경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이다. 표제는 묵서(墨書)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 함차(函次) ‘윤(潤)’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표지와 축봉(軸棒) 모두 인출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 그 의미를 더 한다.
고재식 한국미술품감정센터 대표는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는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고려시대 호국불교의 정신사적 흐름과 닥나무 제지기술, 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 두드려서 윤기가 나고 매끄럽게 하는 도침기술, 각자기술, 목판 인출기술, 당 구양순(歐陽詢) 의 서풍을 바탕으로 한 굳세고 바른 고려시대 글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