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 인턴기자] 대한민국 남자 배구의 '산 역사' 장윤창(57)은 80~90년대를 휩쓸고 미련 없이 코트를 떠났다. 후학 양성을 위해 교직에 몸담은 지도 25년여. 어느덧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시간보다 교단 위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진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경기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장윤창은 학기 막바지답게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논문을 봐주느라 바빴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을 보며 "키가 큰 만큼 마음도 넓어서 그런가, 애들이 잘 찾아온다"고 너털웃음 짓는 그에게 '교수'란 타이틀은 전혀 위화감 없었다.
▲ 배구공을 놓고, 펜을 잡다
은퇴 전 고려증권에서 플레잉 코치로도 활약했던 장윤창은 감독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7~8년 플레잉 코치를 했는데 선수 관리 측면 얘기가 자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장윤창의 고려증권이라고 해도 코트 위에서 뛰지 않을 땐 또 다르다는 걸 보고 회의감을 느꼈다"고 그때 심정을 밝혔다.
당시 경기대 교수는 장윤창에게 모교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가르칠 게 없었던 그는 공부를 결심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영어를 따라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며 "운동할 때도 안 흘린 쌍코피를 공부하면서 흘려봤다"고 유학 시절을 떠올렸다.
선수 때 벌어놓은 돈과 고려증권에서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대준 유학비로 학업을 이어갔지만, IMF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마냥 버틸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수료를 못하고 돌아온 것이 장윤창은 가장 안타까웠다고 곱씹었다.
▲ 교수 장윤창의 연구실 문턱은 낮다
서울대를 비롯한 타 대학에서 강의 경력을 쌓은 그는 2003년 경기대 체육학과에 정식 교수로 부임했다. 장윤창은 "미국에서 그냥 체육 정책을 한 번 공부한 뒤 확실한 진로를 택하려 했다"며 "현장보다는 현장을 잘 관리해주고, 선수들이 좋은 위치에서 운동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만드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교수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체육 인재들을 많이 키워서 현장에서 정책과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목표라 밝힌 그는 "아직도 왜 지도자를 안 하냐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 게 더 보람 있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장윤창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교수로 통했다. 실제 인터뷰 전에도, 도중에도 논문 첨삭을 부탁하거나 취업한 후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연구실을 방문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 비결을 장윤창은 '동병상련'으로 꼽았다.
"선수 때 고난의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아이들이 힘든 길을 가지 않도록 같이 애쓰게 됐다. 그런 게 통한 것 같다. 예전만 해도 교수들이 권위적이라 학생들이 어려워했는데 내 연구실엔 턱이 없다. 아직 교수 연구실을 방문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는데 격의 없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향후 자상했던 교수로 남고 싶다."

▲ 받은 만큼 돌려주는 '베풂'의 미학
장윤창의 제2의 인생은 '베풂'에도 집중했다. 스포츠로 받은 사랑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자는 취지로 주변 스포츠 스타들과 뜻을 모아 만든 스포츠 봉사단 '함께하는 사람들'이 1999년 1월 정식 출범했다.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데는 미국 유학 시절 경험이 한몫했다.
"미국에서 클리닉 프로그램을 가봤는데 옛날 NBA(미프로농구) 스타들이 와서 다 가르쳐 주더라. 거기에 충격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기부하고, 돈을 번 사람들은 재산을 내놓고. 이런 걸 자주 보다 보니 나도 돈이 없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하게 됐다."
장윤창은 현재 국가대표선수회 회장이기도 하다. 은퇴한 전직 국가대표 선수들의 재능을 활용해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취지로 2012년 정식 출범했다. 그는 "전 종목 대표선수들이 모여 스포츠 꿈나무 육성에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며 "매년 여름 스포츠 교실을 열고 대표 선수들이 그 종목 강사를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 배구협회와 김연경
한때 배구협회에 몸담았던 장윤창은 협회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로는 '사심'에서 비롯된 '아집'을 꼽았다. 그는 "배구협회에서 일하는 사람,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사심을 전부 다 버리면 된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심을 버리지 못해 자기 사람만 쓰다 보니 그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자기들끼리 뭉친 그런 아집을 갖고 있으면 깨지를 못한다. 그럼 그 굴레는 그 정도 굴레 밖에 안 된다"며 "폭은 넓게 갖고 다양한 사람을 써야 한다. 정신 차리고 다시 해야할 필요는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부족한 육성 시스템 개선 촉구와 함께 자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했다. 장윤창은 "프로도 답답한 게 나무에 달린 열매만 따 먹는다. 사과나무, 배나무도 20년 뒤엔 물갈이를 해야 하는데 중·고등학교에 팀이 없다"며 "유소년 육성을 위해서도 자본이 필요한데 스포츠토토에서 나오는 돈을 일정 부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배구 여제', '여자 장윤창'이라고도 불리는 후배 김연경도 언급했다. 김연경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극찬하면서도 "언제까지 김연경만 혹사시킬 순 없다. 왜 다른 프로팀들은 선수들을 안 보내냐"며 "다 개인 이기주의, 그렇게 해선 안된다. 김연경 같은 선수를 잘 보호하고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그리고 父情
긴 시간 이야기 끝에 조심스럽게 꺼낸 가족 이야기. 농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장윤창의 큰아들 故 장대한은 201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던 장윤창은 "요새도 많이 운다. 자식이 먼저 가면 가슴에 묻을 수 밖에 없다"며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재다능했기에 더욱 아까운 아들이었다. 그는 "86아시안게임 때 큰 아들이 태어났는데 못봤다. 그래서 그런가 더욱 정이 갔던 아이였다"라며 "미국에 같이 갔을 때 농구를 하더라.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성격은 너무 좋고. 운동은 만능이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작은 아들 장민국을 향한 부정은 더욱 커졌다. 그로 인해 안좋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2015년 장윤창은 당시 장민국의 소속팀 안양 KGC 인삼공사에서 기물을 파손한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당시 해명했던 바와 같이 그는 "사건이 있기 전 인삼공사 당시 단장이 먼저 나한테 연락해 'A 구단의 모 선수를 데려오면 장민국을 트레이드하겠다'라며 트레이드 조율을 부탁했다. 내가 어떻게 나서냐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버님, 한 번만 도와달라'라며 계속해서 부탁하더라"라고 회상했다.
그때 장민국은 벤치에서 출전 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상무에 들어가기 위해선 경기에 뛰어야 했고, 트레이드를 통해서라도 출전 시간 보장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점 때문에 결국 장윤창은 단장의 부탁대로 친분이 있었던 당시 A 구단 감독에게 연락해 인삼공사가 제시한 조건을 전했다.
A 구단이 내부 논의를 거쳐 이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감독을 통해 장윤창에게 전했고, 그는 인삼공사 단장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며칠 뒤 A 구단 감독이 트레이드가 결렬됐다는 문자를 보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연락을 취한 인삼공사 단장은 그에게 사무실로 와 달라고 얘기했고, 그렇게 찾아간 사무실에서 갈등은 심화했다.
장윤창은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더라. 나도 잘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인삼공사의 말 바꾸기에 화가 났다. 힘없는 부모들은 그냥 당하는 거고, 선수들도 희생당하는 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민국은 그해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고, 지난해 상무에 입단했다. 오는 1월 전역을 앞둔 아들을 떠올리며 장윤창은 "기술적인 건 못 가르쳐줘도 운동선수로서 자세는 얘기한다. 정신은 살아있어야 한다"며 "공부도 계속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준비한 질문은 모두 끝났지만 장윤창은 계속해서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대해 강조했다. 꿈나무 육성에 힘써야 하고, 선수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뛸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할 필요가 있으며 은퇴 후에도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년 퇴임을 10여 년 남겨두고 있는 그는 "퇴임 후에 그 쪽에 좀 더 힘을 쏟고 싶다. 국민들이 한국 스포츠를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늘 생각 중"이라고 구체적 목표를 밝히기도 했다. 현장은 떠났지만, 뒤에서 묵묵히 체육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 장윤창, 그의 10년 후가 더욱 기대된다.
사진ㅣ김도형기자 wayne@sportsseou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