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이런 대회에서 '(심판이) 내 손을 들어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파선에 비유된 한국 복싱을 살린 구세주는 여자 복싱 라이트급(60㎏) 오연지(28.인천시청)였다. 오연지는 금메달 확정 순간의 기분을 묻자 이같이 말했다. 나흘 전 링 위에서의 벅찬 감정이 다시 떠올랐나 보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기도 했다.


오연지는 5일 인천 남구 문학동에 있는 인천시청 복싱장에서 스포츠서울과 단독으로 만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지난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국제 전시장(JIEXPO)에서 열린 대회 여자 복싱 라이트급 결승에서 태국의 슈다포른 시손디를 4-1 판정승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 처음으로 졍식 종목으로 채택된 여자 복싱에서 한국은 이전까지 한 번도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다. 성수연(75㎏급)이 광저우에서 동메달, 박진아(-60㎏급)가 4년 전 인천에서 은메달을 거머쥔 게 유일한 성과였다. 더구나 이번 대회에 나선 남녀 10체급 중 준결승에 오른 건 오연지가 유일했다.


지난 4년간 한국 복싱은 지긋한 내부 파벌 다툼 속에서 국제 외교력마저 실종돼 2016 리우올림픽 예선 전원 탈락이라는 불명예를 떠안는 등 최악의 행보를 거듭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세력 다툼 속에서 나동길 총감독의 자격 논란이 발생하는 등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선수들에게 돌아갔다. 9체급이나 8강 이전에 모두 탈락하며 복싱이 좌초 위기에 몰렸다. 그런 가운데 오연지는 홀로 한국 복싱 명예를 걸고 결승까지 진격했고 사상 첫 금메달 결실을 봤다. 그는 "금메달을 따낸 순간 '정말 꿈이 이뤄졌구나', '안될 줄 알았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메이저 대회는 오연지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겼다. 4년 전 인천 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리우올림픽 아시아 예선 8강에서도 쏭잔 타싸마리(태국)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도 판정패했다. 국제 복싱계에서 한국의 힘이 약해졌고 이전 지나친 홈 어드밴티지로 미운털이 박히면서 선수가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오연지는 더 강해졌다. "인천이나 리우 모두 판정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애매한 경기를 하니까 심판이 그렇게 본 것이니 더 확실하게 이기도록 준비하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혹독한 과정을 겪은 오연지의 저력은 아시안게임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비교적 대진운이 따르지 않았다. 16강에서 베트남 류띠듀엔, 8강에서 중국 양원루, 준결승에서 북한 최혜송 등 강자를 연달아 상대했다. 그러나 아웃복서 오연지는 특유의 스피드를 바탕으로 이전보다 더 정교해진 스텝과 수비력, 상대 허점을 노리는 공격으로 승승장구했다. 결승 상대였던 시손디는 8강에서 우승후보인 카자흐스탄의 리마 볼로셴코를 꺾고 올라왔으나 오연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2015년과 2017년 아시아선수권을 2연패한 주인공다운 위용이었다.


단순히 경기력만 올라선 게 아니다. 링에서 스스로 멘털을 조율할 노련미도 생겼다. 그는 "산을 하나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하는 어려운 대진이었지만 오히려 집중력이 더 살아난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고 경기했다. 고비였던 8강 양원루(3-2 판정승)와 경기에선 즐기면서 경기한 것 같다. 마지막일 수 있으니 내 장점을 다 보여주는 마음으로 링에 오르니 의외로 편해지더라"고 말했다.




금메달의 보이지 않는 힘은 소속팀 감독인 김원찬 인천시복싱협회 전무였다. 김 전무는 오연지를 국가대표로 키운 스승이다. 4년 전 인천 대회에서 오연지가 판정 피해를 봤을 때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김 전무는 예기치 않게 징계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오연지 곁을 지켰다. 이번 대회에서도 오연지 뒤를 지키면서 자카르타 현지에서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승전 시상식 이후 오연지가 김 전무를 만나 부둥켜안고 4년 전 '그 일'에 대한 사죄를 했다고 한다. 김 전무는 오히려 오연지를 위로했고 한국에서 가져온 태극기를 전달했다. 오연지는 그 태극기를 들고 '금빛 미소'로 링 주변을 돌았다. 김 전무는 "연지가 태극기 들고 웃는 사진이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됐는데 눈물이 나더라. 동료들이 다 떨어지고 홀로 너무 큰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더 기특하고 기뻤다"고 말했다. 또 "매 경기 고비를 넘기면서 점점 자신감을 갖고 경기하는 게 보이더라. 결승전은 오히려 마음 편하게 봤다. 이제 챔피언다운 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이제 오연지는 오륜기 앞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마지막 꿈을 향해 간다. 2020 도쿄올림픽이 그 무대다. 오연지는 "공격할 때 더 과감하게 하고, 수비할 땐 때리고 빠르게 돌아서는 내 장점을 더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무도 "0.5%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 지금 한국 복싱은 국제무대에서 상대를 완벽하게 이겨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연지가 자만하지 않고 지금처럼 정진하면 충분히 올림픽 무대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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