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윤소윤 인턴기자] "나를 선택한 베트남 축구에 내가 가진 축구 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붓겠다."
박항서 감독이 2년전 베트남 대표팀 취임 기자회견에서 전한 출사표다. 자신 있게 내건 그의 포부는 머지 않아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역에 '박항서 신드롬'이 불고, 온국민이 사랑하는 베트남의 영웅으로 등극하는데 채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쌀딩크'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이 만든 기적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7년 9월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 국가 대표팀의 성인 및 U-23 감독으로 선임되어 같은 해 10월에 정식 취임했다. 축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국가인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의 취임 이후 축구 열풍에 빠졌다. 그를 베트남의 영웅으로 만든 사건들이자 그가 이룩해 낸 베트남 축구의 역사적인 기록을 모아봤다.
▶숙명의 라이벌, 태국을 격파하다
박 감독이 공식취임한지 두달만인 2017년12월, 베트남 U-23대표팀은 M150컵 대회 3-4위전에서 개최국인 태국을 상대하게 됐다. 태국에서는 2년마다 M150 컵이 열린다. 개최국 태국을 포함해 총 6개의 팀이 참가하는 소규모 대회로 주로 참가국의 23세 이하 대표팀이 출전한다.
바로 이 대회에서 베트남은 오랜 숙적인 태국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다. 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을 통틀어 무려 10년 만의 일이었다. 번번이 태국에게 고배를 마셨던 국민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짜릿한 첫 승리였다. 박 감독 이전 대표팀 감독들의 가장 중요한 경질이유가 태국전 패배라고 할 정도로 태국전은 베트남에게 큰 의미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태국과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베트남 축구팬들은 박 감독을 다시 보게됐다. 패배를 모르는 박항서 열풍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사상 최초, AFC 대회 결승 진출을 이루다.
승기를 올린 베트남의 상승세는 지속됐다. 박 감독의 베트남은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까지 거머쥐며 베트남 축구 역사상 AFC 주관 대회 첫 결승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다.
현재 아시아 축구는 한국, 일본과 중동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가 양대 세력을 구축하고 여기에 강호 호주와 최근 성장하고 있는 우주베키스탄이 강세를 이루고 있다. 즉 태국, 베트남이 중심인 동남아시아 국가 대표팀은 아시아 축구에서 전혀 위력적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최근 월드컵과 아시안컵, 아시안게임 등의 순위에서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의 U-23 대표팀이 '2018 AFC U23 챔피언십' 대회 결승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예선에서는 아시아 강호인 호주를 제압했으며, 8강에서는 이라크를 꺾었다. 4강에서는 모두 승부차기까지 간 치열한 접전 끝에 카타르를 꺾고 결승에 극적으로 진출해 더욱 놀라움을 안겼다.
비록 결승전에서는 우즈벡에게 패배했지만, 결승전에서도 선제 실점 후 동점까지 만들어냈다. 연장 후반 종료 직전 결승 골을 내줬지만 경기내용은 좋았다. "졌지만 잘 싸웠다"의 표본인 경기를 만들어내면서 박 감독과 대표팀이 보여준 열정과 투지에 베트남 국민들은 크게 열광했다.
▶Again 2002, 아시안 게임 4강 진출
대한민국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그 중심에는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도 있었다. 지난해 8월에 있었던 아시안게임 축구에서 거둔 4위라는 성적은 베트남 축구계뿐 아니라 베트남 국가 자체에 엄청난 파급력과 활력, 그리고 자신감을 불어넣은 그야말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안게임은 U-23 대회에 비해 참가팀 규모가 크고, 와일드카드 선수 세 명을 추가할 수 있어 참가팀의 전력도 우수하다. 게다가 베트남은 조별 예선에서 일본에게 사상 첫 승리를 거둬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전 연령층의 대표팀을 포함해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아시안 게임 본선이 처음이기 때문. 이 승리를 기반으로 박항서 호는 조별예선에서 3연승을 거둬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후 16강에서는 바레인을, 8강에서는 시리아를 1-0으로 꺾고 4강 진출에 성공해 동남아 국가로는 44년 만에 메달권에 진입하며 엄청난 역사를 쓰는데 성공했다. 베트남이 이룩한 승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축구 강국들을 차례로 무너트리고 4강 진출에 성공했던 기적을 떠올리게 했다.
▶기적은 계속된다. 스즈키 컵 '무패' 우승
베트남 축구 협회가 박항서 감독과 계약을 하던 당시 가장 원했던 것은 바로 아세안 축구연맹(AFF)스즈키컵 우승이었다. 1년 동안 팀을 완성시켜 '동남아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스즈키 컵'에서 우승을 하라는 것이 그가 받은 하나의 미션이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은 이러한 기대에 당당히 부응했다. 베트남은 지난해 12월 베트남 하노이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대회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0으로 눌러 1,2차전 합계 3-2로 승리, 2008년 이후 10년 만에 스즈키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0년 만의 우승과 더불어 '무패' 우승이라는 사실도 주목받았다. 베트남은 A조에 속해 연승 행진을 달렸다. 3승 1무라는 성적을 거둬 A조 1위로 4강에 진출했으며 4강에서도 필리핀을 상대로 2연승을 했다. 스즈키 컵 우승으로 A매치(국가대표 경기) 16경기 연속 무패를 이어가며 프랑스(15경기 무패)를 따돌리고 A매치 최장 무패 신기록을 달성한 국가가 됐다. 2008년 이후 10년 만에 스즈키컵에서 정상에 오른 베트남은 이 우승으로 국제축구연맹(FIFA)랭킹에서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 순위에 오를 가능성을 높이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은 지난달 29일 새벽 '2019 AFC 아시안컵'을 마치고 귀국했다. '사상 첫 아시안컵 8강 진출'이라는 기록을 또 한 번 써 내려간 그는 "운이 따랐을 뿐이다"라며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조국인 대한민국의 성적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경기장에서 직접 한국과 카타르의 경기를 관람했던 박항서 감독은 "그래서 축구가 어려운 것이다. 위에서 보면서 안타까웠다"고 대한민국의 4강 진출 좌절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박항서 감독은 국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3월에 열리는 'AFC U-23 챔피언십'과 2020 도쿄올림픽 예선을 준비할 예정이다. 그는 "도쿄올림픽 전에 베트남과 계약이 끝나지만 우선 3월 예선부터 통과해야 한다"며 대표팀에 대한 책임감을 드러냈다.
베트남 축구계뿐 아니라 베트남 국가 자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영웅'으로 자리한 박항서 감독, 그의 업적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연일 베트남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끌며 순항 중인 박항서 호가 앞으로 또 어떤 기적을 써내려갈지 기대를 모은다.
사진 | 스포츠서울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