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배우근 기자] 볼 수 없는 남편과 걷지 못하는 아내의 위태롭고 짜릿한 유럽여행. 1급 장애를 가진 부부가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건 멋진 일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
서로 만난지 12년, 결혼 5년차. 두 사람은 여행을 좋아한다. 차가 없어 전동휠체어가 갈 수 있는 곳, 부산 여수 등 기차가 닿는 곳이 여행지다. 조금씩 용기가 붙었다. 그래 조금 더 멀리 가보자. 유럽으로 가자. 그렇게 여행은 시작됐다.
남편 제삼열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현재 서울 수서중 국어 교사. 100명이 넘는 아이들의 목소리만으로 이름과 특징을 기억한다. 아내 윤현희씨는 전동휠체어를 타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주부이자 회사원이며 늦깎이 미대생. 루브르 등 박물관에 관심이 많아 유럽행을 결정했다.
|
◇유럽의 소리
앞이 보이지 않는 제삼열 교사는 소리 못지 않게 냄새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새로운 소리가 들렸어요. 당연히 인상적이었죠. 그런데 소리만큼 냄새가 이색적이었어요. 공항에선 표백제 냄새가 났어요. 파리에선 고소한 빵냄새가 진했고요. 여러 향수, 사람들의 체취도 아직 선명해요.”
◇유럽의 길다리가 불편한 윤현희씨에겐 길에 대해 물었다. 윤씨는 섬세함의 차이를 들었다. “한국과 비교해 영국이나 프랑스의 길은 편했어요.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긴 했지만요. 서울도 큰 불편은 없는데, 보도블록을 보면 올라가는 경사면은 있는데 내려가는 곳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유럽에선 그런 걱정은 없었어요.”
◇결국은 사람의 차이윤현희씨는 말한다. “서울에서 저상버스를 기다리는데, 손을 흔들어도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숱해요. 배차시간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해요. 버스를 탄다해도 휠체어가 자리를 잡기전에 출발해요. 그런데 유럽에선 아예 기사님이 버스 시동을 꺼요. 와서 도와주고요. 다른 승객도 휠체어가 먼저 버스에 오르기 전에 아무도 타지 않았어요. 프랑스에선 버스의 하차벨이 고장났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기사에게 말을 옮기고 옮겨 내릴 수 있었어요. 그런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있습니다.”
제삼열씨도 좋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갑자기 배가 아파 길가의 아무 식당에 들어갔어요. 화장실을 쓰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내가 아니라 아내인줄 알았나봐요. 덩치 큰 직원이 나타나더니 화장실까지 업어주겠다고 하는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아니라 내가 급하다고 하니, 손이 아닌 팔꿈치를 내주더라고요. 조금 놀랐어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보행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거죠. 어릴때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자연스러웠어요.”
|
◇우린 모두 장애를 겪을 수 있다. 배려는 장애인의 시각으로
부부는 여행을 통해 장애인을 위한 유럽의 한단계 높은 시스템과 정서를 경험했다. 서울을 예로 들어, 장애인 콜택시는 일반 택시에 비해 저렴하다. 그러나 승차가 쉽지 않다. 보통 2시간, 많게는 3~4시간을 기다린다. 기자와의 만남도 3일 전 택시 가능시간을 확인 후 이뤄졌다.
반면 런던의 일반택시인 블랙캡의 경우, 요금은 상대적으로 비싸도 휠체어가 통째로 들어간다. 윤현희씨는 런던에서 블랙캡을 자유롭게 이용하며 3시간 넘게 덜덜 떨면서 장애인 택시를 기다리던 서울의 어느 겨울밤이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그날 병원에 가지 못했다.
제삼열씨는 “그래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에 비해 상당히 좋아졌어요. 지금은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지만, 전엔 그게 없어 떨어지는 일이 많았어요. 스크린도어 덕분에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편하게 이용하고 있어요. 큰 건물이나 공공기관엔 장애인 화장실도 다 있어요. 10년 전엔 책을 읽기 힘들었는데, 요즘 전자도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서 차이 난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 바라는 복지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교통을 이용하고 생활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
◇볼 수 없는 남편과 걸을 수 없는 아내의 여행
1만 5000㎞를 날아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도움의 손길. 한 흑인 여성이 이들 부부에게 택시는 비싸다며 지하철을 추천했다. 그녀는 교통카드인 오이스터 카드 발급을 도와주었다. 휠체어에 탄 윤현희씨는 모니터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카드 발급과 충전까지 마칠 수 있었다. 초면의 그녀는 이들 부부가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환승역까지 상세히 알려줬다.
인상깊은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작별인사를 하던 그녀가 윤씨에게 제씨를 가리키며, 서로 무슨 관계인지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윤씨가 “남편”이라고 하자 호들갑스럽게 “너무 멋지다. 축하한다. 잘 어울린다”며 축하세례를 퍼부었다. 한국에선 경험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한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이들 부부를 향해 “몸도 불편한 사람끼리 무슨 결혼”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히드로 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편견없이 이들을 축하했다. 그녀의 들뜬 반응에서 서로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부부는 진심을 느꼈다.
|
◇W,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제삼열, 윤현희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만약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럽여행을 갈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특별한 ‘W’다. 이들은 서로의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낯선 땅에서 행복한 경험을 공유했다. 아내는 남편의 미소를 보고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보았다. 눈 감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게 마음이다. 공항에서 도움을 준 그 여성도 그것을 보았기에 이들을 뜨겁게 축하했다고 짐작한다.
유럽 여행, 말이 여행이지 사실 이들에겐 엄청난 도전과도 같다. 용기내어 한 걸음씩 내딛으며 부부는 알게 되었다. 각자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란 걸. 그래서 부부는 말한다.
“많이 불안해요. 나이가 더 들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앞으로도 둘이 의지하며 잘 살 수 있을까. 주변에서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하지만 우리 부부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함께 여행하며 느꼈어요. ‘옆에 이 사람이 있으니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구나.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고요.”“한국에선 부모, 친구가 있어 도움을 청할 수 있어요. 그러나 유럽에선 오롯이 둘만 있었어요. 함께 여행하며 서로 신경쓰고 배려하는 마음을 읽으며,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어요.”PS.
시각장애 1급, 지체장애 1급. 불편한 몸이지만,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여행이란 다시 가고 싶은 곳을 찾는 여정이다. 우리의 삶도 여행의 연속이다. 제삼열, 윤현희 부부는 장애 1급이지만, 사랑과 행복도 1급이다. kenny@sportsseoul.com